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 실리콘 밸리라지만, 영어가 모국어도 아닌 아시아인 여성이 그것도 원격으로 근무를 계속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요?
솔직히 까놓고 말하면, 운이 좋았습니다. 아기를 낳기 전, 자유로운 몸일 때 그 회사에서 인턴을 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죠. 아마도 지금 같은 스펙으로 생판 모르는 외국의 회사에 지원서를 넣으면 ‘광탈’은 따놓은 당상이리라 확신합니다.
어쨌든 자리보전을 한 지 12년 차. 인사팀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관찰하면 딱히 매력 있는 편은 아닙니다. 이직으로 몸값을 올리는 미국 고용 시장에서 이직을 해 본 적도 없고, 지구 반대쪽에 위치해 있어 중요 미팅에 참여할 수도 없으며, 아이가 둘인 데다 둘째는 심지어 어리거든요. 미팅을 앞두고 영어 때문에 긴장하는 것도 여전하고요.
하지만.. 모든 동전은 양면이 있는 법. 이런 단점도 어떻게든 장점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단점을 장점인 척 포장해 보면 그게 언젠가는 진실이 되지 않을까요?
눈치 보기? 성실함!
저의 언니도 미국에 살며 일을 하는 워킹맘입니다. 언니가 항상 농담처럼 스스로에게 하는 소리가 ‘노예근성’이에요. 미국인들은 연봉 협상을 할 때 자신감 팍팍 보이며 딜을 하는데, 자기는 그게 쉽지 않다고 말합니다. 윗사람의 눈치를 보고, 시키지 않아도 게으름 피우지 않고 일하는 게 노예근성 같다고 말이지요.
저도 정말 동의합니다. 간혹 미국은 휴일이 아닌데 한국은 휴일이라 휴가를 낼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때 미국인 동료들은 휴일에 제가 이메일을 답장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오히려 답을 하면 휴일을 방해해서 미안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언제든 ‘아임 레디’ 임을 보이려 애씁니다. 혹시 보스가 보낸 이메일에서 마음에 걸리는 표현이 있으면 혼자 마음 졸이고, 더 완벽하게 해내려 애쓰고 말이죠.
연봉을 협상할 때도, 사실 얼마 전까지는 회사 쪽에서 제시하면 그냥 넙죽 받았습니다. 내가 뭐라고 여기서 더 올리나 싶어서 말이지요.
이게 노예근성이라면 노예근성이지만, 덕분에 제게 성실함이라는 도장이 쿵 찍힌 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아시안에게 당연한 ‘눈치’라는 굴레(?) 덕에, 대처가 빠르고 상황 수습을 잘하며 일을 열심히 한다는 평가를 얻었지요.
아시안, 여성, 엄마
제가 아시안이고 여성이라는 것도, 또 엄마라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장점이 되었습니다.
회사의 사장과 부사장, 수석 엔지니어 모두 금발에 파란 눈인 코카시안 미국인이지만, 저의 직속 상사는 인도인 이민자 여성이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녀도 나처럼 8살 터울의 아들 둘이라는, 드문 공통점이 있었죠. 외국을 전전하며 육아를 하고, 그러면서도 일을 놓고 싶어 하지 않는 저를 인간적으로 무척 응원해 주신 분입니다. 덕분에 저는 그녀의 신뢰를 얻었고, 원격 재택근무임에도 매우 독립적으로 일할 수 있었습니다. 인턴으로 시작했지만 제가 하는 일의 반경이 점차 늘어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이리라 생각해요.
회사의 백인 상사들도 저를 언제나 존중해 주었고, 제가 하는 일에 대해 객관적이고 긍정적인 피드백을 해 주곤 했습니다. 그 경험은 제게 회사에 대한 근본적인 애정을 키워 주었죠. 지금은 제가 인도에 있는 외주 팀을 전담해서 일을 하고 있는데, 그들과의 관계에서도 오픈마인드로 존중하며 일을 할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도 저처럼 생판 다른 대륙에 있는 회사를 위해 일을 하고 있으니, 저랑 비슷하죠. 미팅할 때 인도식 악센트가 좀 있긴 하지만 정말 능력 있고 성실한 분들이라 보스가 떠난 뒤에도 저에게 든든한 동료들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운이 좋아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은 것도 잘 압니다. 하지만 합리적인 회사에서는 일만 잘하면 배경은 관계없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영어가 어려워도 말만 통하면 악센트가 있어도 괜찮습니다. 단점을 단점으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누구에게는 단점이 장점이 되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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