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나만의 승리지만
한 달 전쯤 일입니다.
보스가 이메일이 와서 “오늘 또는 내일” 잠깐 콜 할 시간이 있냐고 묻더군요. 엥? 최소 3-4일, 대개 일주일 전에 약속을 잡는 우리였는데요. 이렇게 촉박하게 전화를 요구하다니, 뭔가 느낌이 이상했어요.
‘짤리는건가 ㅠ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습니다. 드디어 자리를 잡은 줄 알았는데, 비록 재택근무 계약직이지만 쭉 일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제가 맡은 일에 뭔가 단단히 빵꾸(?)가 나서,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일이라 해고 통보를 하려나보다. 아니면 하는 일에 비해 월급으로 많이 받아가니, 청구 시간을 줄이라고 하려나? (시간으로 돈 받는 계약직입니다) 별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최대한 빠른 시간으로 잡아 바로 통화를 했습니다. 한국 시간으로 둘째 등원을 마친 오전 아홉 시 반. 캘리포니아에서는 일과를 마친 직후인 오후 다섯 시 반. 그런데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뭐라고요??!!
떠난다고요??
저의 보스는 회사의 기둥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녀가 없으면 회사가 돌아가질 않았으니까요. 인도의 외주팀도, 저도, 영업 담당 부사장님도, 수많은 고객사들도, 뭔가 조금만 모르겠으면 그녀를 찾았죠.
이직이 잦은 미국 회사에서 13년이나 우리 조직에 몸담은 그녀는 스타트업의 알파이자 오메가였습니다. 저는 언제나 그녀가 제게 일감을 주기만을 기다렸고, 지시를 받으면 충실히 따랐지만 모르는 건 그녀에게 sos를 치곤 했습니다. 제가 한 시간 씨름하는 것보다 그녀와의 5분 대화가 훨씬 효율적이었으니까 말이에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넓어지며 예전보다 sos를 치는 일이 줄기는 했지만, 제 선에서 최대한 해결해보려 하면서도 언제나 마음은 든든했습니다. 언제나 정답을 알고 있는 보스가 제 뒤에 버티고 있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되짚어 보니 몇 달 전부터 이게 좀 달라지긴 했었습니다.
그녀는 제게 전보다 훨씬 다양한 범위의 일을 가르쳤고, 직접 고객사와 컨택하도록 맡기더군요. 이슈가 생길 때마다 스스로 파악해서 해결할 수 있도록 공유 페이지를 만들어 정보를 기록하기 시작했고, 제게도 업무를 보다 세세하게 트래킹하도록 지시했어요.
기둥이 사라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한 저는, 그저 신이 났었습니다. 나도 맘만 먹으면 더 다양한 기능을 할 수 있구나, 나도 언젠가는 우리 보스처럼 유능한 사람이 될 테야, 하면서.
눈치도 참 없었던 거죠.
그녀는 제가 그녀의 업무를 상당 부분 맡아 할 수 있도록 키워놓고, 자신은 물러나려던 것이었어요. 쉬지 않고 달려왔던 13년이 너무 힘들었는지, 무조건 떠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전혀 다른 것을 찾고 싶다며.
처음엔 아쉬운 마음 + 갈피를 잃은 마음뿐이었습니다. 흔히 보기 어려운 여덟 살 터울의 아들 둘이라는 공통분모에, 워킹맘이자 이민자의 삶을 겪어보았다는 공감대도 형성되어 있었기에 작별이 개인적으로 못내 아쉬웠어요. 아쉬움이 조금 가라앉자 갑자기 두려움이 닥쳐왔습니다. 저는 그녀의 직속 부하였는데, 그녀가 나가면 낙동강 오리알이 되는 건 아닐까? 설마… 나도 설 자리를 잃는 걸까?
안 그래도 인수인계로 바쁠 와중에 그녀에게 개인적인 조언을 구했습니다. 위기가 곧 기회라고, 용기를 냈어요. 제가 회사 내에서 좀 더 큰 역할을 맡을 수 있을 것 같냐고, 이 기회에 승진도, 급여 인상도 조금은 타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솔직하게 물었죠. 그녀가 또 바로 전화를 하자고 하더군요. (두 번째의 급박한 통화!) 통화를 하며 나는 무척이나 놀랐습니다.
훈, 너는 준비가 되었어. 너의 개인적 상황만 괜찮다면 무조건 다 할 수 있다고 회사 쪽에 말해. 내가 하는 일을 다 배웠고, 모르는 것이 있다면 내가 월말까지 회사에 있으니 나 떠나기 전에 얼마든지 다 배울 수 있다고 해.
지난번 사장, 부사장과의 미팅에서 내가 말했어. 우리 회사가 지금처럼 잘 돌아가고 있는 건 뒤편에서 한 마디 불평 없이 성실하게 일해온 훈 덕분이라고. 훈을 크게 쓰라고 내가 몇 번이나 얘기했어.
월급? 당연히 올려 달라고 해. 유급 휴가도 달라고 해. 너는 팀의 귀중한 일원이고, 그만한 대우를 받아야 해.
지난 11년의 ‘존버’가 스쳐 지나갔습니다. 워킹맘도 전업맘도 아닌 애매한 알바생 같은 저의 시간이 말이죠. 성실하게 주어진 일을 했지만 회사에서의 미래는 그려보지 못했던 나의 어정쩡한 커리어가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거든요.
시급으로 돈을 받는 계약직이야 타국에 사니 세금 문제 등으로 인해 어쩔 수 없다지만 (계약직은 원래 유급 휴가도 없습니다) ‘직원’이라는 소속감이 적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성실성 하나로 무장하고 꾸준하게 달려온 덕인지 어쨌든 인정을 받은 겁니다. 그것도 제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말이에요.
그 순간이 바로 방구석 직장 생활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지난달 말을 기점으로 정말로 떠났습니다. 이메일함의 90퍼센트는 그녀의 이름이기에 아직도 그 이메일 주소를 CC 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회사와 상의 끝에 저는 계약직 자리를 그대로 유지하되, 인도의 외주팀 관리를 포함하여 더 큰 책임을 지게 되었습니다. 보스의 직급이었던 디렉터급의 대체자를 나중에 구하기는 하겠지만, 그녀의 업무를 대체한다기보다는 좀 더 광범위하게 운용 가능한 사람을 구할 것이라고 하더군요. 즉, 그녀의 일은 대부분 저에게 넘어왔고, 그에 상응하도록 조건도 재협상했습니다. (쫄보라 엄청 떨렸음ㅠㅠ)
겉에서 보기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저는 여전히 맨날 집에서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사람이니까요.
그러나 저에게는, 이역만리 떨어진 땅에서 십 년 만에 인턴에서 진짜 ’커리어‘를 일궈낸 내게는, 이거야말로 승리랍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이렇게 말하렵니다. 존버하면 승리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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