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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Nov 02. 2020

이것만큼은 남녀가 똑같을 줄 알았는데

기후변화는 누구에게나 공평하지 않다

"기후변화는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가혹하다"는 말, 이해 가시나요?  

지구가 더워지는 건 남자나 여자나 똑같은 거지, 여기서도 피곤하게 성 구분을 해야 하나요? 대학원 수업에서 젠더와 기후변화에 대한 논의를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강사님은 이런 예를 들으셨어요.


수도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은 저개발국가에서는 주로 여성이 멀리까지 물을 길으러 갑니다. 요즘 더욱 건조해진 기후로 인해 여성들이 항아리를 지고 걸어가야 할 길이 훨씬 더 멀어졌어요. 그리고, 그 여정 중 수많은 여성들이 성폭행을 당합니다 (UNDP 자료, [1]).


아니 뭐라고


이게 그냥 특수 상황에 국한된 해프닝이면 참 좋겠는데, 그게 아닌가 봅니다. 바로 엊그제 읽은 것인데, "젠더"를 기후변화 관련해서 언급한 103개의 연구 결과를 분석해 보니, 여성은 생각보다 다양한 측면에서 기후변화의 큰 피해자가 되고 있다고 해요 (전반적인 내용은 Carbon Brief에 실린 이 분석[2]을 참고로 했습니다). 단순히 생물학적 분류로 남녀 문제가 아니라, 많은 경우 사회 안에서 담당하는 역할 때문이죠. 실제로, 살펴본 논문 중 68%는 여성이 더 큰 피해를 본다고 결론 내렸지만, 30%는 남성이 더 큰 희생자라는 사실을 찾아냈다고 해요.


아래 지도에서 보면 보라색이 남성이 더 큰 피해를 입은 경우를, 주황색이 여성이 더 큰 피해를 입은 경우를 나타냅니다. 기후변화의 피해를 젠더의 시각에서 접근해서 분석한 거죠.

성별에 따른 기후변화 피해 연구 결과 (이미지: Carbon Brief)


그러면 대체!! 어떤 경로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요?


사회 문화적 이유

물론 지역마다 다르지만, 저개발국에서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남성보다 낮은 경우가 많고, 남성이 에스코트하지 않으면 외출하지도 못하기도 하죠. 폭염 때문에 아프거나 태풍으로 인해 집이 무너지고 크게 다쳤을 때, 여자들은 의료적인 도움을 구하러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해요. 남자라면 거리낌 없이 도와 달라며 달려 나갔을 것을, 집에서만 앓고 있는 여자들이 많이 있단 거죠. 또, 방글라데시의 한 연구에 따르면 여자들은 사리를 입고 다니기 때문에 홍수가 났을 때 물을 헤치고 탈출하기가 훨씬 어렵다고 합니다. (이럴 땐 그냥 벗고 가면 안되려나)

사리를 입고 물난리를 피하는 여성들 (이미지: SOPA Images Limited)


식량 조달

기후변화는 농업 생산량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요, 농업 인구가 많은 저개발국의 경우 그 피해가 더욱 막심하죠. 식량이 부족하면 제한된 식량을 누가 더 많이 먹을까요? 인도, 이란, 가나, 필리핀 등에서 수행된 여러 연구 결과에 따르면, 많은 국가에서 남성이 식량 소비의 우선권을 쥡니다. 특히 남아 선호가 남아있는 지역의 경우 여자 어린이들은 식량 조달이 어려울 때 제일 먼저 먹을 권리를 빼앗긴다고 하니,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가정 폭력과 성폭력

이번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학교가 문을 닫는 바람에 아동 학대 사례가 많이 보도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후변화로 인해 자연재해가 잦아지면 생업을 잃고 스트레스가 많아져서 가정 폭력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극지방에서는 사냥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많은데, 기후변화와 함께 사냥감의 개체 수가 줄어 예전만큼 포획하지 못하면서 아내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남성들이 많아졌다고 해요. 안타까운 것은 가정 폭력이 함께 늘어났다는 것이죠.  


미국, 호주, 미얀마 등에서는 사이클론 등 큰 피해를 낳은 기후 사태를 겪고 난 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여성이 남성보다 심하게 겪었다고 합니다. 왜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WHO에 따르면 자연재해를 겪으며 성폭력이 증가하는데 여성의 PTSD는 그와 연관이 깊다고 해요.

 

외상"전"스트레스 장애? (이미지: Climate Etc.)



때로는 남성이 더 큰 희생자

이런저런 경로로 여성들이 큰 피해를 보고 있지만, 사실 그건 남자와 여자의 생물학적 차이 때문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고착된 남성의, 또 여성의 역할 때문입니다. (한 가지 예외는 가임기 여성이 '생물학적 여자이기 때문에' 마주하는 위험성인데요, 임신 중 자연재해로 병원 인프라가 파괴되거나 전염병으로 인해 유산을 할 가능성 등이죠.)


그래서 같은 이유로 남자들이 더 큰 피해를 보는 경우도 많지요. 예를 들어 미국은 사회적으로 단절된 채 혼자서 살아가는 노인 중 남성 비율이 높은데, 따라서 폭염이 올 때 고독사를 할 위험이 여성보다 더 높다고 합니다. 또, 한국에서 진행된 연구는 기온 상승과 자살률의 상관관계를 찾아냈는데, 남성이 여성보다 2배나 자살률이 높다고 해요.


기후변화로 인한 전염병 증가도 (특히 저개발국에서는) 외부 활동이 더 많은 남성들이 불리합니다. 이 지긋지긋한 코로나도 인수공통 전염병(zoonotic disease)데요, 2080년이 되면 모기로 인한 전염병 노출 인구가 10억 명 이상 증가할 것이라고 해요. 또, 온난화로 인해 해수면과 해수의 온도가 함께 상승하며 소금물과 높은 기온에서 잘 번식하는 박테리아 때문에 전염병 노출이 더 심각해졌죠. 남성들은 라임병(Lyme disease)이나 주혈흡충병(schistosomiasis) 등의 질병에 더 취약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말라리아의 경우 가사 노동 시 오염수를 더 많이 접하게 되는 여성들이 더 피해가 심하다고 합니다.

홍수 후 물 안에 서 있는 남성 (이미지: Nature Picture Library / Alamy Stock Photo)



결국 이 모든 문제는 훨씬 더 뿌리 깊은 젠더 이슈를 건드립니다. "여성은 항상 피해자야!"라며 편을 나누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막연히 똑같다고 생각하는 피해도 특정 집단의 사람들에게 더 힘겹게 다가올 수 있단 걸 알아 둬야겠지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례는 빈부 격차에 따른 판이한 기후변화의 경험이지요. "기후변화는 가지지 못한 자(have-nots)에게 더 가혹하다"는 말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납득이 가니까요. 냉방시설을 구비하고 가동할 여유가 되는 사람들이야 에어컨 빵빵하게 틀고 집안에서 더위사냥을 빨며 "요즘 날이 왜 이리 더워"라고 불평하면 되죠. 더 부자들은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 씽씽 스키라도 타면 될 거고요. 하지만 피서를 갈 곳도, 생업을 멈출 여유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1도, 2도 높아지는 것이 더없이 고통스러울 겁니다.


앞서 말한 수업에서 강사님은 네팔 출신이었는데, 그 나라에서 느끼는 기후변화는 저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어요. 고산 지대이다 보니 히말라야산 위 호수 주변에 만년설과 빙하가 있는데, 이것이 녹아서 물이 많아지며 갑작스럽게 폭발하듯 홍수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요. 원래는 아주 드문 현상이었지만, 주변의 마을들이 완전히 초토화되기 때문에 온난화가 심각해지며 더욱 걱정스러운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를 지칭하는 용어도 따로 있어서, "glacial lake outburst flood (GLOF)"라고 부르죠. 이런 사태는 우리에겐 그저 먼 나라 얘기지만, 누군가에겐 하루하루 숨통을 조여 오는 실질적 위협일 겁니다.

GLOF의 위협 (이미지: Columbia University)

 

우리를 둘러싼 우주의 신비와 현실에 우리가 좀 더 분명하게 주의를 기울일수록 파괴를 향한 인류의 성향이 약화될 것입니다.
-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으로 유명한 레이첼 카슨의 말입니다. 그녀가 성 역할을 강요당하며 무시당하기도 했다는 건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요. (책 표지에 저자 사진을 싣지 않았다고 '이런 아름다운 글을 쓴 여자의 얼굴이 궁금하다'라고 했다죠. 무려 뉴욕타임스에서..) 우리를 둘러싼 우주의 '신비'와 '현실.' 과학은 매일 조금씩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우리가 얼마나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표지 이미지 출처: IUCN

[1] https://www.undp.org/content/undp/en/home/blog/2020/why-climate-change-fuels-violence-against-women.html

[2] https://www.carbonbrief.org/mapped-how-climate-change-disproportionately-affects-womens-health?utm_campaign=Carbon%20Brief%20Daily%20Briefing&utm_content=20201029&utm_medium=email&utm_source=Revue%20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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