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게이츠의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
올 초, 빌 게이츠가 쓴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How To Avoid Climate Disaster)>이 출판되었을 때 제가 우연히 읽은 서평은 그다지 훌륭하진 않았습니다. 이제까지 나온 기후변화 분야의 책 중 내용이 다소 평이하며 딱히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지 못했단 거였죠. (지금 다시 찾아보니 제법 많은 사람들이 좋은 평가를 내리고 있네요. 제가 초반에 본 서평이 유독 별로였나 봅니다ㅎㅎ)
그래도 빌 게이츠가 기후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저는 궁금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그는 자기 믿음을 실현하기 위해 실제로 거대한 돈을 투자하고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게다가 빌 게이츠가 누굽니까. 세계의 정치, 경제 거물들과 일상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궁금한 것이 생기면 최고의 석학을 찾아가 배움을 청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요. 마치 시험 준비를 할 때 유명한 족집게 과외 선생님의 집중 훈련을 받은 것처럼, 이 책에도 그가 배운 양질의 지식이 녹아들어가 있습니다.
이 책이 전해주는 중요한 메시지는 여럿 있지만, 아무래도 지금 누구나 기억해야 할 점은 다음의 두 가지인 듯합니다.
1. 넷 제로는 꼭 이뤄내야 한다.
실현 가능성은 일단 살포시 접어 둡시다. 온실가스 순 배출량을 0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아예 이산화탄소 배출을 안 하자는 게 아니라, 약간의 배출을 하더라도 그 이상을 오프셋 시킬만한 다른 기술을 이용해서 어쨌든 대기 중으로 배출되는 온실가스는 0이 되어야 한단 겁니다.
저도 늘 예시를 들던 욕조의 비유가 이 책에도 나옵니다. 이미 물을 콸콸 틀어 놓은 욕조에서 점점 수위가 올라갑니다. 곧 큰일이 벌어질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면 욕조의 마개를 빼거나 물을 퍼내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일단은 수도꼭지를 잠가야겠죠. 그래서 다들 넷 제로, 넷 제로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말이 쉽지, 온실가스 510억 톤을 감축해야 한단 소리인데요, 일단 너무 엄청난 숫자라 감도 잘 안 옵니다. 이제까지 숨 쉬듯 자연스레 자리 잡은 인류의 라이프스타일이 얼마나 많은 해를 끼치고 있었는지 나타내는 숫자라고 생각하면 괜스레 숙연해지지요.
2. 지금보다 훨씬 더 극단적인 감축이 필요하며, 노력은 동시 다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아무튼 그래서 510톤을 감축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빌 게이츠는 온실가스 배출원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해당 분야에서 온실가스를 줄일 수 있는 여러 기술을 논합니다. 쉬운 사례로는 이미 많이 이용하고 있는 태양광이나 풍력 같은 신재생 에너지부터, 비용이 많이 들고 상용화가 요원한 탄소 직접 포집 같은 기술도 언급하지요.
여기서 그가 이렇게 줄줄 나열하는 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혁신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지속해 왔고 앞으로도 계획하고 있는 인물로서, 빌 게이츠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나라도 얻어걸리면 그걸로 됐다."
실제로 지금 배출되고 있는 어마어마한 온실 가스를 넷 제로로 만들려고 하면 하나의 마법과 같은 해결책이 있는 건 아닙니다. 엄청난 신기술이 발견되어 뿅! 하고 모든 것이 해결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지만 우리의 노력은 모든 가능한 분야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그리고 최선을 다해 이루어져야 해요.
기후변화 부문에서 유명한 논문이 하나 있는데요, 거기서 아래 그래프를 가져왔습니다 [1]. 그래프 중 제일 위의 까만 점선이 지금까지 인류가 배출해온, 그리고 앞으로 배출할 것 같은 온실가스 추세입니다. 수많은 개도국들이 빈곤에서 탈출하고 더 많은 인구가 개발된 환경에서 살게 되면 아마 온실가스 배출량은 점점 더 많아질 테니까요. 그런데 이걸 아래쪽 주황색 선처럼 줄여야 되는 상황입니다. (노란색 영역을 줄이면 되는 거죠)
이 논문에서는 이 양을 8개의 '쐐기(wedge)'로 나눕니다. 그리고 각 쐐기를 담당할 8가지의 기술을 말하죠. 이 기술은 1) 에너지 효율화, 2) 연료 전환, 3) 탄소 채집 및 저장, 4) 원자력 발전, 5) 풍력, 6) 태양 에너지, 7) 바이오매스, 8) 자연적 제거(삼림 등)가 바로 그것인데요, 즉 예를 들어 석탄 발전소를 대체하기 위해 원자력 발전을 현재의 2배로 늘리면 쐐기 하나가 제거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쐐기가 하나라도 제거되지 않으면 결코 주황색 선을 만날 수 없단 겁니다. 이 모든 목표는 동시에,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달성되어야 합니다.
빌 게이츠는 여기에 더해, 행여나 한 기술 혁신이 실패하더라도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기술 혁신을 달성하기 위해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이 난관을 타개할 유일한 방법은 기술이란 거죠.
이 책의 최장점은 쉬운 언어로 썼다는 겁니다. 저는 이 쪽을 공부했는데도 간혹 신문 기사나 책을 읽다 보면 금방 지루해짐을 느끼는데요, 너무 자주 들어본 말은 피로감이 느껴지고 너무 전문적인 말은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빌 게이츠도 대중의 눈높이를 잘 아는 듯합니다.
예를 들어 온실가스 배출원을 다음과 같이 나눕니다:
- 무언가를 만드는 것(시멘트, 철, 플라스틱): 31%
- 전기(전력생산): 27%
- 무언가를 기르는 것(식물, 동물): 19%
-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비행기, 트럭, 화물선): 16%
- 따뜻하고 시원하게 하는 것(냉난방 시설, 냉장고): 7%
또, 전력 소비량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단순한 사례를 들지요:
- 세계: 5,000 GW
- 미국: 1,000 GW
- 중간 크기의 도시: 1 GW
- 작은 마을: 1 MW
- 평균적인 미국 가정: 1 kW
딱딱한 용어보다 훨씬 와 닿는 느낌이었습니다. 또 혁신에 대해서도 수요와 공급을 논하는 걸 보면 역시 비즈니즈 맨이란 생각도 들었고요. 무엇보다 정말 정말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을 논의하면서도 낙관주의를 잃지 않는 어조라서, 기후변화의 현주소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너무 우울하지 않게(ㅎㅎ) 읽을 수 있었어요. 처음 읽었던 서평과 달리, 저는 정부나 기업의 정책 결정자들을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유용한 책이라고 생각했어요. 어쨌든 제목 그대로 기후재앙은 피해야 할 테니까요.
[1] https://cmi.princeton.edu/resources/stabilization-wedges/introdu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