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눈과 초대형 열돔,그리고 가뭄
몇 년 전 무더운 여름, 미국에 살 때였어요. 한국에서처럼 연유와 팥을 넣은 빙수는 없지만, 띵동띵동 노래를 울리는 아이스크림 트럭에 가면 곱게 갈린 얼음 위에 달콤한 불량 시럽을 듬뿍 뿌린 스노우콘을 먹을 수 있었죠. 어린 아들의 손에 새빨간 시럽을 뿌린 스노우콘을 하나 쥐어주면 얼마나 좋아했던지요.
스노우콘 같은 수박 눈?!
그런데 요즘 알프스 산맥과 극지방에서 이런 스노우콘과 똑같은 풍경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수박 눈(watermelon snow)이라고도 불리지만 그보다 훨씬 섬뜩한 핏빛 빙하(blood glacier)라고 말하기도 한대요. 사진을 보니 눈부신 하얀 눈 대신, 정말로 불그스름한 핑크색 눈이 펼쳐져 있더군요.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정답은 '조류(algae)'입니다. 미역이나 김 같은 물풀들, 그런 조류 말이죠. 얼음이 녹으며 그 속에 파묻혀 있던 조류가 표면 위로 노출이 되는데, 얘네들은 이렇게 대기 중에 노출되면 자외선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색을 바꾼다고 해요. 그 때문에 눈 색깔도 붉게 보이는 거죠.
아휴, 어쨌든 조류도 자연의 일부니, 그럼 뭐 이상한 건 아니네요. 그쵸?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조류 발생 자체도 기후온난화와 오염 물질의 유입으로 급증했을 뿐 아니라, 조류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증가할수록 더 잘 살거든요. 이러한 수박 눈의 발생 빈도 역시 '장기적으로 증가'하고 있음을 과학자들이 관찰했습니다. 실제로 고산 지대에 살던 사람들은 예전에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수박 눈을 요즘은 매년 보고 있다고 말한다고 해요.
그뿐이 아닙니다. 눈이 하얀색일 때는 그나마 태양빛을 많이 반사시켜서 온난화를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는데요, 그래서 전 세계 건물의 지붕을 죄다 새하얗게 칠해버리자는 아이디어도 있을 정도예요. 그런데 눈의 색이 하얀색보다 어두워지면 이 알베도(반사율)의 변화로 인해 지구 온난화가 더 가속화되는 효과가 생깁니다. 눈이 녹으며 수박 눈이 생겼는데, 그 때문에 눈이 더 녹는다니 그야말로 악순환이네요.
이번 달 초, 미국 유타 주의 주지사는 시민들에게 '다 함께 마음을 모아 비가 오도록 기도하자'라는 트윗을 보냈습니다. 엥? 뭐라고요? 지금 2021년인데요? 기우제 지내자는 건가
유타 주가 물론 모르몬교의 본고장이기도 하고 종교적 색채가 짙은 주기는 하지만, 주지사가 공식적으로 기도를 하자고까지 말하는 배경에는 지독한 가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 가뭄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으니 신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고 해요.
현재 미국 남서부에는 초대형 열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로이터 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남서부 사막 위에 드리운 고기압의 영향으로 늦봄 치고 드물게 극심한 더위가 지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더 힐(The Hill) 역시 더위의 수준이 기록적이고 위험해서 피해를 입는 미국인의 수가 5천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된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1200년 만의 '대가뭄 시대'가 도래했다는 거죠.
지구 온난화는 홍수, 가뭄 둘 다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홍수와 가뭄은 반대의 현상이지만, 둘 다 극심해진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하죠. 그 이유는 대기의 물 순환이 강해지기 때문인데요, 원래 습했던 곳은 공기가 물을 더 머금어서 비를 왕창 뿌리고, 원래 건조했던 곳은 공기가 물을 더 빨아들여서 바싹바싹 더 말라버리기 때문입니다.
지금 가뭄에 처한 지역도 마찬가지예요. 대기의 온도가 올라가며 식물과 토양에서 수분이 더 많이 증발되고, 물을 많이 뺏긴 토양은 대기로부터 더 많은 수분을 흡수하려 합니다. 원래 강이나 개울로 가야 하는 여분의 수분이 없어지기 때문에 강이나 저수지도 모두 말라 버리죠. 실제로 미국 최대의 댐인 후버 댐 저수지의 수위는 댐 건설 이후 80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연합통신이 보도한 아래 사진을 보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죠.
이 때문에 지금 네바다와 캘리포니아 등의 주에서는 걱정이 태산입니다. 정원 물 주기를 금지하기도 하고, 샤워 시간을 정하자는 말도 있고요. 정원에 잔디 대신 물을 적게 먹는 구조로 바꾸는 데 자금을 지원하기도 합니다. 잔디밭의 경우 스프링클러로 꾸준히 물을 줘서 관리해야 하는데, 돌조각을 놓는다든가 선인장으로 꾸미면 물이 많이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일반 가정뿐 아니라 농업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아몬드 농사의 경우 물이 많이 필요한 것으로 유명한데, 지금 캘리포니아 아몬드 농장은 농사를 다 망쳤다고 해요. 예전에 캘리포니아 와이너리 투어를 다닐 때 도로 양쪽에 가득한 아몬드 나무를 본 적이 있는데, 그 농장 주인도 올해는 울상을 짓고 있겠네요ㅠㅠ
뉴욕타임스는 다음의 '가뭄 지도'를 실으며 최근의 가뭄이 얼마나 심한지 독자들이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끔 했습니다. 매년 6월을 비교해 놓으니 올해가 얼마나 심한지 딱 보이죠.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교민들은 매년 일어나던 산불이 올해는 정말로 걷잡을 수 없을까 봐 벌써 걱정을 하고 있더군요. 또 그 와중에 온도가 높아지니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얼음은 왕창 녹고 있다는데, 총체적 난국이죠.
'가뭄은 다음번 팬데믹이 될 것'
심각해 보이긴 해도, 뭐 미국 얘기니까 일단은 괜찮다고요? 미국 남서부의 사례는 그저 '조금 먼저 드러난' 기후변화의 폐해일 뿐입니다. 최근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유럽연합(EU) 식량 수입의 무려 40%가 2050경에 이르면 가뭄에 극심히 취약해질 것이라고 합니다. 육류, 코코아, 커피 등을 포함한 수많은 작물들이 영향을 받는단 거죠.
가뭄은 전 세계의 문제입니다. UN 산하 기구인 재난위험경감(UN Office for Disaster Risk Reduction, UNDRR)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번 세기에만 가뭄에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는' 사람의 수자 15억 명일 것이라고 합니다. UN 사무총장의 특별 대변인 Mami Mizutori는 "가뭄은 다음번 팬데믹이 될 것이며, 이를 치료할 백신은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죠. 정말 섬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