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주, 휴가를 냈다.
아이도 방학이고 써머스쿨도 끝났는데, 아무리 재택근무라도 종종거리며 업무에 치이기 싫었다. 브런치에 혼자 매주 쓰는 글도 2주간은 쉬기로 했다. 아이를 데리고 놀러 다니긴 했지만, 다른 건 정말 맘 편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하루를 보내고 침대에 누웠을 때 괜스레 공허하고 기분이 안 좋았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거의 내내 그러다가, 2주가 지나 다시 업무에 복귀하기 직전에는 거의 울 정도로 우울했다. 임신한 탓에 밤에 화장실을 자주 가는데, 한 번 깨면 잠도 잘 오지 않고 잡생각이 들었다. 2학년이 되는 아이가 걱정이 되고, 낮에 남편이 했던 말을 곱씹고, 온몸이 가려운 것 같아 긁다 보면 덩달아 마음이 가려웠다.
다시 업무를 시작한 날, 원래 여름은 회사가 그리 바쁜 시기가 아닌데 하필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몰려든 일이 많아 무척이나 바빴다. 아침 일찍 아이를 등교시키고 자리에 앉아 몇 시간 꼼짝도 않고 일을 했다. 잠깐 쉬려고 고개를 들었는데, 마음속에 반가운 감정이 찾아들었다. '즐겁다.'
일이 재밌었던 건 아니다. 밀린 업무는 평소 하는 일상적인 작업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다만 오랜만에 집중하고 몰입하는 경험이 즐거웠다. 심심해서 딱히 연락 올 곳도 없으면서 스마트폰을 열고, 포털 사이트를 열어 뉴스를 클릭하는 그 무료함이 사라진 것이 좋았다. 열 개 보면 한두 개 재미있을까 말까 한 유머 포스팅을 읽는 미지근한 기대감이 사라져서 좋았다.
내가 지난 2주 무얼 했을까. 뭘 읽고 뭘 봤을까.
유튜브 먹방을 봤다. (정확히 말하면 휴대폰으로 틀어놓고 아이패드를 열어 인터넷 서핑을 했다.)
유튜브에서 영화 요약본을 봤다.
포털 사이트에서 자극적인 해외 토픽을 찾아서 읽었다.
짧은 웹툰을 봤다.
커뮤니티에 들어가 남이 한 속풀이와 그 아래 달린 댓글들을 읽었다.
넷플릭스에서 시트콤을 봤다.
기후변화 뉴스레터를 제목만 읽었다.
(나는 SNS를 하지 않지만, 만일 했다면 이 목록에 피드를 확인하는 것도 하루에 12번 정도 추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책을 한 글자도 읽지 않았다.
글을 쓰지 않았다.
남이 쓴 글도 거의 읽지 않았다.
호흡이 긴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보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분야의 기사나 보도 자료를 읽지 않았다.
내 감정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평소의 나는 책을 좋아한다. 꼭 어렵거나 심오한 책이 아니더라도, 하다 못해 여러 번 읽은 소설이라도 활자에 집중해서 읽어야 마음에 닻이 내려진 듯 잔잔해지곤 한다. 하지만 한 번 ‘읽지 않는 삶’에 익숙해지니, 무섭게도 점점 더 책을 찾아 손에 드는 것이 어려워졌다. 인쇄된 글자가 마음속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눈앞에서 흐트러져 버렸다. 단편적이고 순간적인 만족감을 주는 ‘스크롤링’에 비해 ‘페이지 터닝’은 너무 느리고 무거웠다. 그렇게 2주가 금세 흘러 버렸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스마트폰의 등장과 더불어 요즘의 문화는 점점 짧고 순간적이 되어 간다. 생각해 보면 내가 요즘 한 활동들도 아주 짧은 시간만을 요구한다. 유튜브 영상도 10분을 넘어가면 지루하고, 아무리 자극적인 '네이트 판' 썰도 너무 구구절절하면 읽기가 싫다. 내 주변 친구들도 마지막으로 영화를 본 게 언제인지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영화를 보려면 두세 시간 시간을 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몰입의 즐거움>이나 <딥 워크> 같은 책들이 더 인기를 끄는 것 아닐까 싶다. (나도 읽으면서 스마트폰을 멀리하고 멀티태스킹을 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건만, 물론 그 결심은 빛바랜 지 오래다.)
꼰대처럼 '요즘은 이래서 못써'라는 건 아니다. 스마트폰 덕에 버스 안에서도 사랑하는 사람과 다정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거리에서 불현듯 생각나는 걸 찾아볼 수 있다.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방향으로 인류가 진화하고 있는 걸 그저 내가 목격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힘들여 읽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삶이 얼마나 불행한가 깨닫는다. 상실이나 재난처럼 고통스러운 형태의 불행이라기보다, 보다 일상적이고 덜 극적인 불행이다. 저자가 공들여 써낸 책 한 권을 며칠에 걸쳐 읽어내고 책장을 덮었을 때 느껴지는 기쁨, 그것을 얻기 위해 요구되는 시간과 노력이 없는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부끄럽게도 그동안 아이에게 책을 읽으라는 잔소리는 지난 2주 동안 더 많이 했다. 바지런히 책을 빌려다 주고 읽어준 나의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이는 책과는 담을 쌓은 소년인데, 원래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휴가 기간 동안은 책을 읽지 않는 것이 너무 못마땅했다. 결국 터져 나온 책 좀 읽으라는 잔소리를 묵묵히 듣던 아이는 조용히 말했다. "엄마, 엄마가 그렇게 말해도 하나도 helpful하지 않아."
결국 나의 산만한 생활을,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소소한 불행을 아이에게 전가하고 있었던 셈이다. 휴가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오며, 나는 그리도 무겁게만 느껴졌던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읽기 시작했다. 산만함이라는 나의 바다에, 닻이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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