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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Jun 10. 2021

8년 만에 임신을 했다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원래 규칙적이었던 내가 생리 불순이 생기더니, 급기야 예정일이 2주 넘게 지나도 소식이 없었을 때만 해도, 나는 뭔가 내 몸에 단단히 문제가 생겼구나 싶어 병원 예약을 잡으려던 참이었다. 아마 병원에 가면 다른 검사를 하기 전에 임신 여부를 묻겠지 싶어 미리 해 두겠다는 마음으로 테스트 키트를 샀다. 그런데...


두 줄.

 

와, 왓...?


외동아들을 키우는 것에 대해 몇 번 글을 쓴 적이 있을 만큼, 나의 정체성은 ‘외동아들 엄마’였다. 그런데 8년 만의 임신이라니.


아, 엄밀히 말하면 8년 만에 처음으로 임신을 한 건 아니다. 사실 2-3년 전쯤, 홍콩에 와서 자리를 잡고 나서 둘째 생각을 한 적은 있다. 막상 계획을 하니 쉽게 생기지 않았다. 몇 번의 시도 후 임신을 했지만, 확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초기 유산을 경험했었다.


흔하다는 초기 계류유산이었지만 가벼이 털고 넘기기는 쉽지 않았다. 건강이야 금방 회복했지만, 호르몬 때문인지 그 후 꽤 오랫동안 우울했다. 그러다가 코로나가 터지고, 온라인 스쿨링에 내 일에, 글을 쓰는 일까지. 정신이 없었다. 아이를 다시 갖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기대를 내려놓으면 보내 주신다고 했던가. 그렇게 기적처럼, 생각지도 못하게 아기가 찾아왔다.



첫째를 가졌을 때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첫째도 예고 없이 찾아오긴 했지만, 당시 나는 8년이나 젊었다. 평생 수많은 아기를 받아 오신, 나이 지긋하신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도 아기에게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너무나 확신하셔서, 그 느긋함이 나에게도 전해졌다. 나는 입덧도 없었고 (먹고 싶은 건 많았다), 컨디션도 좋았다. 임산부 친구들과 햇볕 내리쬐는 캘리포니아 산책길을 하루 종일 걸어 다니고, 여행도 많이 다녔다.


하지만 8년이나 나이 먹은 모체는 두 번째 아기에 대해 다르게 반응했다. 입덧, 그 무시무시한 두 글자. 친구들에게 말로만 듣던 "인생 최의 숙취를 겪으며 뱃멀미를 하는 기분"이 뭔지 이제야 알았다. 브런치에 '입덧'이란 키워드를 입력하고 좌르르 뜨는 글들을 읽으며, 나는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나마 나는 아주 심한 편은 아니라는 것에 안도해야 할지, 나보다 심한 입덧을 겪으며 임신 기간을 견뎌낸 그분들을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아이는 오전 수업이라도 매일 학교를 갔고, 코로나 직전 고용한 헬퍼(라 쓰고 신의 한 수라 읽는다) 덕에 하루의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 이불을 쥐어뜯으며(...) 보낼 수 있었다. 메슥메슥거리는 뱃속 때문에 평소 좋아하던 책도 한 글자도 읽을 수 없었고, 넷플릭스에서 가장 재미있다는 드라마를 켜도 한 장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매주 손꼽아 기다리던 범죄물 팟캐스트가 업데이트되어도 1분이 지나지 않아 다시 껐다.


우습게도 유일하게 견딜 수 있는 건 먹방 시청이었다. 예전에는 대체 남이 먹는 걸 왜 보나 생각했는데, 댓글들을 보니 환자나 임산부 등 마음대로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친근하게 일상 얘기를 하며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을 맛있게 먹는 푸근한 언니. 그녀가 먹는 것을 보는 동안만큼은 속이 달래졌다. (하지만 물론 그녀가 먹은 걸 똑같이 차려서 먹으면 고통스러운 구역질이 시작됐다. 보기만 해야 한다.)


임신 중반이 되면 입덧이 마법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도 깨달았다. 전에는 그냥 어느 날 눈을 뜨면 그날부터는 '입덧 끝!'이라고 외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임산부 비타민에 든 철분제 때문인지, 아니면 입덧이란 놈이 원래 그런 것인지, 밥을 잘 먹기 시작한 다음부터도 하루에 한두 번은 속이 메스꺼웠고 냄새에는 여전히 예민했다. 홍콩 로컬 식당에는 거위나 닭을 통째로 구워서 목 부분을 꼬챙이에 꿴 후 창문에 줄줄이 걸어 놓곤 하는데, 그 모습은 20주가 지난 지금도 내 속을 뒤집어 놓는다.

이런 모습.. (이미지: CNA)

예기치 않게 찾아온 아기라고 해서 잃어도 괜찮은 건 아니었다. 임신 중반인 15-6주가 될 때까지도, 나는 매일 화장실에 갈 때마다 피가 묻어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속옷을 내렸다. 몇 년 전 유산을 했을 때 생각지도 못하게 묻어 나왔던 갈색 혈이 이번에도 보일까 봐 남몰래 전전긍긍했다. 8년 전 첫 임신 때는 확인하자마자 만나는 사람들마다 주책맞게 얘기하고 당연한 듯 축하를 받곤 했는데, 이번에는 가족이나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조차 말하기가 두려웠다. 병원에 가서 초음파를 통해 힘차게 콩콩 뛰는 심장을 보고 정상적인 아기 크기를 보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주변에 말할 용기가 생겼다.


여자들은 '엄마'라는 이름으로 대동 단결하곤 한다. 하지만 유산의 경험으로 느낀 건 꼭 엄마가 되지 않아도 깊은 공감과 위로를 나눌 수 있단 점이었다. 몇 년 전, 유산 직후 나는 가장 친한 언니 두 명을 각각 만나 울적하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생각지도 못하게, 약속이나 한 것처럼 언니들은 둘 다 '힘들지? 사실은 나도 경험이 있어'라며 진심으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몸보다 마음이 더 힘들었다며, 축 쳐져 있는 내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었다.


브런치에서 보이는 난임이나 유산 글들을 읽으며, 예전 같으면 몰랐을 두꺼운 감정의 책을 표지라도 들춰본 것 같아 마음이 더 아팠다. 그래서 이번 임신은 더 기쁘지만, 더 조심스러웠다. 나의 설렘이 언제라도 슬픔으로 바뀔 수 있다는 생각에.



나의 몸과 마음이 조심조심 새로운 상태에 적응하는 동안, 어린 동생이 생길 첫째에 대한 걱정도 조금씩 찾아왔다. 우리 아이도 정체성이 언제까지나 '외동아들'이었으니까. 다른 집 외동아이들은 한 번쯤 동생이나 강아지를 가지고 싶다고 조른다던데, 우리 아이는 한 번도 원하지 않았다. 동생이 있는 친구를 만나면 곧잘 어울려 놀았지만, 헤어지면 집에 와서 혼자만의 휴식 시간을 즐기는 스타일의 꼬마다. 서너 살 때부터 동생이 있으면 좋겠냐고 물으면 "아니, 난 싫어."라고 단호하게 대답하곤 했다.


신기하게도, 우리가 몇 년 전 둘째를 계획했을 때는 아이도 갑자기 동생이 가지고 싶다고 했었다. 남동생이 있으면 좋겠다며, 이름은 'Black Dolphin'으로 짓겠다고. (그건 대체 어디서 나온 거니) 하지만 아이에겐 말하지도 않았던 아기를 잃었을 때쯤 아이의 흥미도 없어졌고, 까만 돌고래는 그렇게 기억의 저편으로 넘어갔다.


이번에 내가 입덧으로 고생하며 종일 누워 있자, 영문 모르던 아이는 걱정을 하고 악몽까지 꾸기 시작했다. 어린아이에게 엄마가 아픈 건 정말 불안한 일일 게다. 원래 우리 부부는 혹시라도 또 유산을 할지 모르니 첫째에게는 최대한 늦게 말해줄 생각이었지만, 아이가 내 걱정을 너무 하니 그 이유를 말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2주쯤, 병원에서 초음파 사진을 찍은 날 우리는 아이를 앉혀 놓고 말해 주었다. 동생이 생겼다고. 엄마가 아픈 건 병이 나서가 아니라 아기 때문이라고.


아이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진짜야? 정말이야? 아...." 하며 나라를 잃은 사람처럼 고개를 떨궜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게 꿈이면 좋겠어."


마음이 아팠다. 어떻게 아이에게 설명해 줄까. 그런데 내 걱정과 달리 아이의 마음은 너무나 빨리 바뀌었다. 슬퍼하는 아이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몇 시간 후 문득 자기가 얼마나 큰 형아/오빠가 될지, 얼마나 많은 것을 가르쳐줄 수 있으며 얼마나 잘 지켜줄 수 있을지 생각한 듯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아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엄마! 까만 돌고래가 다행히 생겼네." (그렇다. 아이가 잘못될까봐 태명도 짓지 않고 있었는데, 우리 둘째 태명은 당연히(?) 까만 돌고래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배가 조금씩 나와서, 이제는 지하철 노약자석이 민망하지 않을 만큼은 볼록하다. 소심한 나는 아직도 몇 달 후면 정말로 건강한 아이를 품에 안을 수 있을지, 또 의학의 발전으로도 뱃속에서 잡아내지 못한 문제가 있지나 않을지 걱정한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꿀렁꿀렁 뱃속에서 느껴지는 생명을 기쁜 마음으로 그려 본다. 동그랗게 웅크린 채 뱃속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을 나의 두 번째 아이.


첫째가 내 배를 부여잡고 "까만 돌고래야, 건강해라. 보고 싶어."라고 말할 때, 우리 부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이가 없을 때 부모의 삶을 상상할 수 없듯, 아이가 하나일 때에 비해 둘일 때는 차원이 다른 세상이 펼쳐지리라. 게다가 8년의 널찍한 공간이 두 아이에 어떻게 작용할지 나와 남편은 아직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까지의 육아보다 훨씬 더 힘들겠지만, 그 행복감의 깊이도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서막을 우리는 엿보고 있다.


까만 돌고래야, 건강히만 나오렴! 



*표지 이미지: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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