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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름바름 Aug 08. 2018

독박 육아꾼 경제 독립군 되기

#5 이제 나의 사랑은

이제 나의 사랑은     
종기처럼 나의 사랑은 곪아
이제는 터지려 하네,
메스를 든 당신들,
그 칼 그림자를 피해 내 사랑은
뒷전으로만 맴돌다가
이제는 어둠 속으로 숨어
종기처럼 문둥병처럼
짓물러 터지려 하네.          최승자 『이 時代의 사랑』中     


 18개월 된 아이가 내 인생에 메스를 들이댄다는 생각을 했다. 그 칼 그림자는 깊고 아팠다. 아이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안아달라는 아이를 장난감 앞에 앉혀두고, 그 날 당장 넘겨야 할 원고를 번개처럼 따 다 다 닥 치고 있었다. 두어 줄만 더 채우면 보채는 아이를 안아 줄 수 있다. 가뿐하게 원고를 털고 출근할 수 있다. 쾌락의 시간이 다가오는 순간, 정적 그리고 암전! 아이가 컴퓨터 전원 버튼을 꾹 눌러버렸다. 제발 제발……. 자동 저장을 믿으며 나는 본능적으로 전원을 다시 켰다. 순백의 모니터에 커서가 홀로 껌벅인다. 모두 사라졌다. 이놈의 고물 컴퓨터, 책상을 탕 탕 치고 소리를 지른다.


꺼버리면 어떻게 해……. 엄마가 이거 언제 다시 또 쳐


당시에 나는 글을 생각하고 표현하며 쓰지 않고 기계적으로 쳤다. 첫째 출산 후 다시 시작한 방송국 일, 지키고 싶었다. 잘하고 싶었다. 엄마에게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저녁 일곱 시 넘어 데려왔다. 수원에서 서울까지 택시와 기차 온갖 교통수단을 다 동원해도 퇴근 후 아이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저녁 일곱 시가 넘었다. 아이는 엄마 품이 고프고 나는 내 미래, 꿈이 고팠다. 일을 할 수 있는 절대 시간이 부족했고 그 시간을 공격하며 뺏는 건 언제나 아이였다. 밥을 주고 씻기고 잠깐 놀고 자고 일어나면 찾아야 할 자료, 써야 할 원고가 밀려들었다. ‘불행’이 같은 모습으로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내 아이가 메스를 든 당신이라 생각했다. 내 사랑을 뒷전으로 맴돌게 하고 무서운 칼 그림자를 드리우는 존재. 아이는 금방 웃는다. 조금 전까지 미친 듯 화를 낸 나를 보며 웃는다. 슬픔을 피하기 위한 웃음이 아니다. 그냥 웃는다. 나는 비겁했다. 저런 아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나쁜 악역을 맡겨 버렸다. 그래야 내 원고가 항상 늦는 이유, 방송 끝나고 회식을 못 가는 이유, 더 나은 출연자를 섭외하지 못한 이유, 폭풍이 몰아친 것처럼 엉망진창인 집안 풍경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줌마 말고 작가라 불리고 싶은 인생이었다. 그냥 응원받고 싶었다. 최승자 시인은 절망한다. 사랑이 숨어버려 종기처럼 문둥병처럼 짓물러 터지려 해서. 나는 직접 메스를 들어야겠다. 타인의 손에 쥐어진 메스처럼 위험한 건 없다. 그 타인이 비록 내 아이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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