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받는 것은 모욕이다.”
“이해받는 것은 모욕이다.”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가 남긴 이 문장은 처음 마주했을 때 고개를 갸웃하게 만듭니다.
이해는 공감과 위로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던가? 누군가 나를 알아준다는 것만큼 따뜻한 일이 또 있을까?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내가 니 마음 완벽하게 이해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마음 한구석이 경직됐던 경험이 있다면, 당신은 이미 이 말의 깊은 뜻을 몸으로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이해’라는 행위가 때로 얼마나 잔인한 폭력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라는 우주를 가두는 ‘이해’라는 상자
우리는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말할 때, 실은 그 사람의 복잡다단한 우주를 나의 얄팍한 경험과 지식이라는 상자 안에 구겨 넣고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살아 숨 쉬는 한 인간의 다층적인 슬픔과 기쁨, 모순과 역사를 ‘내향적인 사람’, ‘자존감이 낮은 친구’, ‘애정결핍이 있는 동료’와 같은 편리한 이름표 하나로 봉인해 버립니다.
마치 살아있는 나비를 잡아 핀으로 고정하고 ‘호랑나비’라는 라벨을 붙여 박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순간 나비의 생명과 날갯짓은 사라지고, 오직 분류 가능한 ‘대상’만이 남습니다. “너를 이해해”라는 말 속에는 때로 상대를 온전히 만나려는 겸손함 대신, 상대를 내 멋대로 규정하고 통제하려는 지적인 오만함이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미묘한 폭력성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모욕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상담실에서 마주한 두 개의 ‘이해’
제가 상담실 의자에 앉아 내담자를 마주할 때, 이 말의 무게는 더욱 무겁게 다가옵니다. 내담자는 자신의 가장 연약하고 혼란스러운 부분을 꺼내 보입니다. 그때 상담자가 가장 쉽게 빠지는 유혹이 바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유혹입니다.
한 내담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늘 자신을 탓하며, 관계가 끝난 뒤에는 극심한 허무함에 시달린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상담자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 OO씨는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가 강한 ‘착한아이 콤플렉스’를 겪고 계시는군요.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크신 거네요. 충분히 이해됩니다.”
이 말은 명쾌하고 전문적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이 순간, 내담자는 자신의 고유한 아픔을 심리학 용어라는 박제 상자 안에 갇혔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그녀는 더 이상 살아있는 ‘나’가 아니라 분석되어야 할 ‘사례’가 됩니다.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의 따뜻한 연결은 끊어지고, 차가운 분석만이 남습니다. 이것이 바로 키르케고르가 말한 ‘모욕’의 순간입니다.
두 번째 상담자는 이렇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마음이 ‘텅 빈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지금, 그 느낌이 몸 어디쯤에 머물고 있나요?”
이 질문은 내담자를 규정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녀가 자신의 경험과 온전히 만나도록 초대합니다. ‘텅 빈 느낌’의 색깔, 온도, 모양을 함께 탐색하며, 그 생생한 현상 속에 머무릅니다. 정답을 주는 대신, 그녀가 자신의 길 위에서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돕습니다. 이것은 ‘이해’를 넘어선 ‘만남’의 순간입니다.
이해하려 하지 않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진정한 연결은 상대를 완벽히 이해하겠다는 오만을 내려놓을 때 시작됩니다.
나의 잣대로 재단하고, 나의 언어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멈출 때 비로소 상대의 세상이 있는 그대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모호함과 혼란을 견디는 용기입니다. 섣부른 조언이나 분석으로 침묵의 어색함을 깨는 대신, 그저 상대의 곁에서 함께 침묵해 주는 것. 그의 고통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겸허히 인정하고, 그저 손을 잡아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깊은 위로이자 최고의 ‘만남’이 아닐까요?
오늘, 당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배우자를, 친구를, 자녀를, 혹은 당신 자신을.
당신은 그를 ‘이해’하려 애썼나요, 아니면 그저 ‘만나려’ 했나요?
그의 우주를 당신의 상자에 가두지 마십시오.
대신, 그의 세상에 초대받은 손님처럼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그 신비로운 풍경을 경이롭게 바라봐 주십시오. 어쩌면 우리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하고 진실한 사랑은 그것뿐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