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스턴스>(2024) 심리-분석 리뷰

혹은 자기-살육의 에세이

https://youtu.be/SVuNBndq0uM?si=dMyd4Xk5hOLKMpvl


흥행한 지 한참되었지만, 늦게나마 영화 <서브스턴스>(2024)를 보았습니다.



극 중 완벽하고 사랑받는 자신을 갈망하여 자신의 희생도 감내하는 수(Sue), 사람들이 보지못하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이러한 희생이 버겁다고 호소하는 엘리자베스(Elizabeth Sparkle).


영화 속 캐릭터 설명

엘리자베스 스파클은 오스카상을 받은 여배우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도 이름을 남긴 인물입니다.
50번째 생일에 중년이라는 이유로 방송에서 하차당하고, 절망에 빠져 교통사고까지 겪게 됩니다.

병원에서 수상한 USB를 건네받게 되며,
여기에는 ‘서브스턴스(Substance)’라는 혈청이 들어 있습니다.

이 혈청을 사용하면 7일 간 젊고 완벽한 자신(‘수’라는 젊은 분열체)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열한 두 인격은 주기적으로 몸을 교체해야 하며, 원래의 엘리자베스는 점차 사회적으로, 심리적으로 소외되는 과정을 겪습니다.

출처: Wikipedia


흥미로운 내용이었지만,

사실 보는 내내 잔인하고 고어한 장면들 때문에 충격적이고 거북한 감정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본 이후에 남은 것은 공포스럽고 그로테스크한 장면이 아니라,

승자가 없는 전쟁(엘리자베스 VS 수)의 씁쓸함이었습니다.


한동안 나는 나, 그리고 상담실을 오간 내담자들, 사실은 익숙하게 겪는 이 전쟁을 생각했습니다.

영화를 본 후에 맴도는 씁쓸한 끝맛이 내 안에서 벌어졌던 내면의 싸움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기로는 나는 내 안에서 그것을 자주봤습니다.


데미 무어(엘리자베스 역)의 필사적인 눈빛과 마거릿 퀄리(수 역)의 차가운 완벽함은 내 안에서 오랫동안 겪었던 익숙한 것이었던 겁니다.


이 영화는 바디-호러를 빌려, 우리 내면의 가장 은밀하고 치명적인 전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자기-살육의 전쟁' 입니다.


나는 심리치료를 할 때 종종 두 의자 기법을 씁니다.

한 의자에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상전(Topdog)의 목소리가 앉고, 다른 의자에는 '지치고 고통스럽다'는 하인(Underdog)이 앉습니다. 상담의 목적은 그들이 서로의 소리를 듣고 화해하며 통합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 개념을 조금 더 쉽게 풀어보자면, 상전은 '너는 완벽해야만 해'라고 끊임없이 채찍질하는 우리 안의 가혹한 비판자입니다. 그리고 하인은 그 채찍에 맞아 아프다고 징징대는, 쉴 곳을 찾는 우리의 지친 현실 자아입니다. 우리는 매일 이 둘의 명령과 고통 속에서 균형을 잃고 비틀거립니다.



영화<서브스턴스>는 러닝타임 2시간 동안 우리에게 잔혹하게 물었습니다.


'과연 그들은 화해할 의지가 있었는가?'


엘리자베스(하인)와 수(상전). 그들은 언뜻 보면 서로 다른 존재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는 늙고 초라한 현실 자아의 안락을 원했고, 다른 하나는 젊고 완벽한 존재를 통해 세상의 사랑을 쟁취하려 했습니다.


러닝타임 내내 나의 마음도 그 둘의 입장을 오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두 마음은 영화라는 이야기에서 꾸며낸 가상의 이야기로 비춰지기보다,

내가 겪고 있는 내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말미에 들어 영화는 자기 파멸에 이르는 장면을 보여주지만, 사실 중요한 메시지는 그들은 결국 '엘리자베스 스파클'이라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극단적인 (공동의)생존 전략이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영화 말미 흉측하게 변해버린 주인공의 모습에서 엘리자베스와 수, 모두의 얼굴이 비칩니다. 그들이 보이는 눈물과 괴로움은 다른 이유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젊음을 지키지 못해서, 이 모든 노력이 버거워서가 아닙니다.


결국 자신을 지키지 못한 것 때문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인은 "이대로도 괜찮다"며 현실의 나를 지키려 했고, 상전은 "완벽해야만 살아남는다"며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나를 지키려 했습니다. 그들의 (나를 지킨다는)사명은 같았지만, 방식은 달랐지요.

하지만 그 방식의 차이가 곧 서로를 죽이고자 하는 폭력이 되었습니다.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 겁니다.


사실 우리는 현실에서 이 전쟁을 겪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 모두는 이 살육전의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 엘리자베스이자 수(Sue) 입니다.

이 때 우리들의 내면 싸움은 단순한 '고민'이 아니라, '생존 전쟁'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나누는 내면의 대화가 사소한 말다툼일 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존재의 가치를 건 처절한 투쟁이지요.


가장 비극적인 지점은, 이 투쟁을 관찰하고 중재해야 할 이 모든 상황을 잠잠히 '관망하는 자아'가 실종되었다는 것입니다.

엘리자베스는 두 자아 중 어느 한쪽에 완전히 몰입한 채, 끊임없이 상대를 배척하고 대상화했습니다.

엘리자베스와 수는 동일한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서로를 그녀(She)라고 부르는 장면은,

주인공이 어느 한 쪽에 완전히 매몰되어 있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암시합니다.


러닝타임 동안 나는 느꼈습니다.

'나는 완벽하고 사랑 받아야 한다'는 상전의 입장이 되어 '늙고 쇠약한 나'를 혐오했고,

'나는 쉬고 싶다'는 하인의 입장이 되어 '완벽함의 강박'을 비난했습니다.

두 자아를 동시에 바라보는 건강한 시선은 개념적으로만 존재했을 뿐, 그녀의 몸과 마음에는 없었습니다.

그 시선이 부재했기에, 그들 사이의 경계는 무너지고, 결국 자아 전체가 파국으로 치달았던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우리가 상담실에서 내 안의 두 목소리를 듣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파괴적인 '전쟁'을 멈추고, 서로가 가진 똑같은 '사명', 나를 지키려는 사명을 인정하며 '동맹'을 맺게 하는 것. "나는 너 없이는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을 이룰 수 없다"는 가장 기본적인 협력을 깨닫게 하는 것.


서로의 목소리, 깊은 입장을 이해하는 그 순간,
비난과 두 목소리는 사라지고 통합된 나라는 침잠에 접어듭니다.


나는 매일 상담실에서 의자에 앉은 내담자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들의 내면에 있는 '엘리자베스'와 '수'가 서로를 끌어안는 순간,

비로소 고통은 멈추는 그 순간을 목격합니다.

사명을 통합하고, 자신이라는 존재를 '지금-여기'에서 다시 한번 만나는 용기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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