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차 한러 인문교류포럼을 다녀와서-
모스크바 푸쉬킨 광장 야경(필자)
함영준 (단국대학교 교수)
팬데믹으로 막히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주저하던 러시아로의 비행은 제10차 한·러 인문교류포럼의 초청으로 성사되었다. 무려 4년 만에 러시아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직항로가 막혀버린 지금 타시켄트를 거쳐 환승해야 하는 일은 시간의 늘어남보다 심리적으로 멀어진 러시아와의 거리였다. 돌이켜 보건대 33년 전 유학을 결심하고 떠나올 때인 1990년 "소련 시절"에도 직항으로 들어왔는데, 이 긴 시간의 진보 속에서 한·러 관계는 직항이 아닌 환승의 수준으로 격하된 듯하여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돌아가고 거쳐 가는 길이라도 남아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지금의 한·러 관계는 연극으로 치면 ‘인터미션(중간휴식)’ 시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1막이 끝나고 2막이 시작되기 전 인터미션의 시간은 단순한 휴식과 정지의 시간이 아니다. 배우들은 새로운 2막을 준비하고, 관객들은 그 2막을 기다리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배우인가, 아니면 관객인가? 러시아의 친구로, 양국 관계의 일렬에 선 우리는 관객이 아니라 연기자들일 것이다. 실제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2막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포럼은 짧았지만, 여운은 길었다. 포럼 내내 각자 준비된 양국 연기자들의 열성과 이를 지켜보는 관객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기다려주는 대사관의 따뜻함까지 어쩌면 진정한 의미의 2막을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포럼이 끝나고 다른 선생님들은 모두 바쁜 일정 때문에 곧바로 귀국했지만 나는 다행히 연구년이라는 핑계로 러시아에 더 오래 남을 수 있었다. 나의 러시아는 언제나 그렇듯이 밤의 시간이다. 저녁만 되면 나는 극장으로 달려가는 습관을 포기하지 않는다. 포럼이 끝난 2일부터 11일까지 본 다섯 편의 연극 속에서 환호와 절망, 그리고 가능성을 되새겨 본다. 내가 본 연극 다섯 편 중 세 편에 환호했고, 두 편엔 좌절했다. 하지만 각 연극에 대한 평을 쓸 자리는 아니고 이 환호와 좌절이 이번 러시아에서 바라본 러시아의 현주소가 아닐지 하는 생각으로 이 글을 쓴다.
우크라이나와의 갈등과 전쟁으로 수많은 문화계 인사들이 러시아를 떠나 서구로 자리를 옮겼다. 연극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러시아 연극의 가장 중요한 연출가 중 한 명인 키릴 세레브렌니코프는 오랜 탄압 생활을 피해 독일에 정착했고, 드미트리 크리모프는 미국으로, 유리 부투소프는 파리를 거쳐 라트비아에 둥지를 틀었다. 라트비아인이지만 러시아 연극의 가장 중요한 자원이었던 바흐탄고프 극장의 투미나스와 마야콥스키 극장의 카라바우스키스 역시 자신들의 나라인 리투아니아로 돌아갔다. 러시아 연극의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떠나지 않은 사람 중에서도 자리를 잃은 연극인들이 눈에 띄었다. 볼쇼이 극장은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마린스키와 더불어 겸직하고, 러시아 연극협회장에는 블라디미르 마시코프가 알렉산드르 칼랴긴을 대신하여 임명되었으며, 러시아 지방연극의 전설인 보로네시 챔버 극장의 미하일 비치코프는 경질되었다. 모두가 정치적 판단으로 보이며, 새로운 자리는 모두가 친푸틴 인사로 채워진다는 모습에서 우리의 블랙리스트 악몽이 떠올라 씁쓸했다. 오랜 개인적 친구들이 사라져간 모스크바의 극장가를 서성이며 나의 좌절은 공연의 내용보다 더욱 아프게 다가왔다. 실제로 1막이 끝난 뒤 2막을 기다리지 못하고 인터미션을 이용해 극장을 도망치듯 빠져나온 두 편의 좌절한 공연에 대한 나의 관객 태도가 한·러 관계를 기다리는 여러 사람의 마음이 될까 두려워졌다.
이렇게 러시아 연극이 탄압받는 모습에서 나에게 문득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고작해야 몇천, 몇만의 관객밖에 없는 연극 장르에서 왜 러시아는 이토록 연극인들에 대한 제재에 열을 올릴까? 이 문제를 두고 연극인들은 “연극이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은 연극이 사회의 도구 역할을 하지 못하는 한국의 연극 현실 속에 있는 나에게 충격과 부러움의 양가적 감정을 주었다.
당분간 러시아 연극계는 떠난 이들의 빈자리가 적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엄혹한 소련 시절에도 중단없이 거장들을 배출했던 러시아 연극은 새로운 길을 찾을 것이다. 왜냐하면 러시아 연극은 이미 ‘방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 방향은 진실을 찾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집중력이다. 방향이 있으면 길은 다시 생긴다. 길만 만들다 방향을 놓치면 길은 폐허가 되는 경험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했던가?
아직 남아 있는 이들, 숨죽이고 있는 이들, 또는 진심으로 푸틴을 지지하는 이들 모두 러시아 연극의 방향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아직 연극계의 원로인 레프 도진이 남아 있고, 세르게이 제노바치가 꿈을 꾸며, 카마 긴카스가 포효하고 있다. 중견그룹의 거장들인 푸시킨 극장의 예브게니 피사레프와 아직 힘을 잃지 않은 페테르부르크의 안드레이 마구치도 건재하다. 그리고 거기에 새롭게 떠오르는 젊은 연극인들은 이 시간을 이겨 나갈 또 하나의 희망으로 보인다. 성장하는 러시아 뮤지컬계를 책임질 젊은 알렉세이 프란데티가 렌콤극장을 책임지고, 27살의 연출가인 안톤 무지칸스키는 영국에서 공부한 이력으로 러시아 뮤지컬의 도약을 꿈꾼다. 이들을 바라보면서 나의 러시아 연극에 대한 환호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마치 이번 모스크바 체류기간에 내가 환호한 연극 <1900>에서 올레크 멘시코프가 읊조리던 대사처럼. “당신에게 좋은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당신에겐 아직 희망이 있는 거예요!”
연극<1900> 공연 극장인 예르몰로바극장 로비 (필자)
2주간 머물렀던 러시아를 떠나면서 러시아 연극이 하나의 기호처럼 지금의 한·러 관계를 모델화하는 듯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러시아에 대한 좌절과 환호가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며 무엇보다 중요한 ‘방향’을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방향 속에 작은 길이라도 내고, 이 방향 속에서 숨 쉴 수 있는 작은 공간이라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온다. 현재의 인터미션이 끝나고 2막이 시작될 때 환호할 관객들을 그리며, 우리가 들려줄 좋은 이야기를 들어줄 친구들을 기다리며 이 시간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
그리하여 2024년 블라디보스토크 태평양 국제 연극 페스티벌과 2025년 모스크바 체호프 국제 연극 페스티벌에 한국의 연극을 초청하겠다는 미하일 스브이드코이 러시아 대통령 문화교류 특별대표의 제안은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제2막의 시작이 될 방향일 것이다.
* 이글은 "러시아-유라시아 포커스"769호에 게재된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