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움 혹은 루소포비아의 시작-
"콘스탄티노플은 우리의 것이어야 한다"
- 츄체프-
프랑스 사람은 만나면 음식과 사랑 이야기를, 독일인은 철학을, 미국인은 돈을 이야기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러시아인은? 그들은 신을 이야기한다. 그 신은 기독교의 신이다. 러시아의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잠시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4세기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로마는 얼마 후 동, 서로 분열되고, 476년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과 훈족등 이교도들에게 처절히 유린당하며 몰락한다. 바로 이 5세기 이후부터 1쳔년간 로마의 적통을 이어가며 번성했던 “동로마” 제국이 우리가 알고 있는 천년 로마이다. 다만 패망한 서로마에는 교황과 세속 왕의 지속적인 갈등이 반복되었고, 황제 교황주의를 채택한 동로마는 기독교 제국으로 발전하다가 11세기 교회 대 분열이 일어나며 서방은 카톨릭으로, 동방은 정(통)교회로 갈라진다.[1] 돌아보면 폐허가 되어 인구 10여 만으로 몰락한 서로마에 비하면 100만이 넘는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은 진정한 로마의 후계자이자, 거대 기독교 제국이었다.
비잔틴의 몰락 - 서방의 배신!
이 위대한 비잔티움 제국의 쇠락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타락한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부터 시작한다. 십자군은 예루살렘과 기독교 세계를 지키겠다는 애초의 명분과 반대로, 돈과 물질을 향해 “경로이탈”을 한다. 십자군은 이슬람을 향하던 길을 멈추고 같은 기독교 국가인 비잔티움을 침략하여 약탈한다. 이 약탈 후 급격히 약화된 동로마는 2세기후인 15세기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러시아의 기독교 수용(988) – 동방 정교회!
이 긴 역사가 러시아 종교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러시아는 아직 교회 대 분열이 일어나기 이전에 기독교를 수용한다. 블라디미르 대공은 988년 전 국민을 드네프르강에 넣어 세례를 준 후 기독교 국가임을 선포한다. 흔히 러시아의 정교회 수용과정은 당시 선진적인 종교를 받아들이기 위해 세계 유수한 4대 종교를 둘러보고 난 후 결정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유대교는 사상은 좋지만 구원이 유대인에게만 해당된다는 점 때문에, 카톨릭은 이미 이교도들에 의해 오염되었다는 이유로, 이슬람은 술 좋아하는 러시아인이 술과 돼지고기를 금지한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마침내 비잔티움의 기독교 “정(통)교회”를 국교로 받이들이게 된다.
러시아가 비잔티움의 정교회를 수용한 것은 정치, 경제, 지리적으로 지극히 합리적이고 현명한 선택이었다. 정치적으로 당시 동로마 황제는 군사지원의 대가로 블라디미르 대공에게 자기 여동생과 결혼 제안한다. 또한 항구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은 무역의 측면에서 지리, 경제적으로 러시아에게 훨씬 유리하였으며, 100만이 넘는 인구와 이슬람과의 접촉속에 풍요로워진 문화, 예술, 기술이 모두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당시 비잔티움은 “우주의 빛이며 도시 중의 도시였다.”
러시아 정교회 –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무엇보다 비잔티움 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온 사신의 표현은 이 종교가 향후 러시아의 정신세계에 어떤 영향을 던져줄지 예견하고 있다. 사신은 정교회 예배의 모습을 보며 “하늘에 있는지 땅에 있는지 모를 지경”의 엑스타시를 느꼈고 그 “아름다움”을 잊을 수 없다는 기록을 남긴다. 러시아가 비잔티움에서 받아들인 것 중 가장 중요한 하나가 바로 이 “아름다움”에 대한 열정이라는 사실이다.
러시아에서 “아름다움”은 단순히 시각적이고 물리적인 요소가 아니라, 종교적이며 동시에 “근원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후일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고 한 말은 훨씬 깊은 철학적, 종교적 의미를 지닌다 할 것이다. 정교신앙에서 "아름다움은 진실”한 것이며 “진실은 곧 구원”으로 향한다는 심오한 생각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전 세계를 매료시키는 러시아 문화 예술의 “아름다움”이 종교적 전통과 맥이 닿아있음을 알게 해 준다. 그러므로 만일 서구에서 사용하는 아름다움이 “개인적”이라면, 러시아에서 아름다움은 “세상”끝까지 이르는 “구원”의 여정이라는 보다 확대된 논리를 부여 받는다. 독일 사상가 W. 슈바르츠가 “러시아인은 본질적으로 인류를 구하려는 이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는 지적은 바로 이 아름다움이 구원에 이르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루소포비아의 시작점!
비잔티움의 정교를 수용한 순간부터 카톨릭의 서방은 러시아를 “타자화” 하였다. 러시아가 동로마의 종교적 정치적 후계자가 되겠다고 결정했을 때 동방에 대한 서방의 증오는 그대로 러시아로 전이되었다. 대체 서방은 왜 동방을 그토록 미워했을까? 만일 비잔티움이 1천년 기독교를 유지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훨씬 더 세속화 되고 타락 하지 않았을까? 만일 비잔티움이 강력한 이슬람 세력의 서진을 막아주지 않았다며, 서방은 자신의 평화를 지켜나갈 수 있었을까? 만일 자신들의 배신으로 파멸된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이탈리아로 정착한 수많은 학자, 예술가들의 “문명과 문화”가 없었더라면 서방의 르네상스는 가능하였을까?
이러한 빚짐에도 불구하고 대체 왜 그랬을까? 스티븐 런치맨은 서방의 비잔티움에 대한 경쟁심과, 질투 그리고 물질적 욕망과 더불어 “위대한 도시를 곤경에 버려두었다는 죄책감”[2]까지 복합적인 원인으로 들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루소포비아의 기원은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하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러시아가 동방 정교회가 아닌 카톨릭을 수용하였더라면 서방은 의심없이 유럽의 가족으로 받아 주었을 것이라고 <루소포비아>의 저자 기 메탕은 주장한다.
비잔티움이 멸망한 후 동로마의 적통을 받아들인 곳이 러시아 제국의 시발점이 되는 “모스크바” 공국이다. 모스크바는 정통 기독교의 적자라는 신념을 유지하고 “모스크바 제3로마”를 선언한다. 물론 서방의 제3로마에 대한 불쾌감은 러시아의 “유럽 점령을 위한 공포”로 해석한다. 서방의 입장에서 러시아는 “타락한 얼음의 제국”이며, 자신들의 멋진 고딕 교회가 끝나는 비 유럽의 야만국이 된다. 서방은 비잔티움의 “황제교황주의” 전통을 이어받은 러시아를 향해 “야만스럽고 독재적인 동방”이 자신을 점령하려는 팽창 야욕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것은 역사적으로 사실이 아니다.
서방은 “제3로마 이론”이 등장하기 300년전인 12세기부터 러시아를 카톨릭으로 개종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던가. 비록 알렉산더 넵스키와 전투에서 패배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소위 “북방 십자군”이라는 튜턴 기사단의 집요한 침략이 그것 아닌가? 12세기부터 서방의 러시아에 대한 혐오는 그후 더 복잡한 “루소포비아”로 형성되고 있고 그 역사가 1천년 이르고 있다.[3]
다름의 이해
만일 유럽이 "권리" 라는 개념에 몰두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면, 러시아는 정교회 덕분에 "진리"라는 개념을 추종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만일 유럽에서 예술이 “개인적인 영역”, 즉 인간에 방점을 찍고 있다면, 러시아에서는 진실과 “신의 영역”을 추구한다고 할 것이다. 만일 유럽인들이 “정의”를 외친다면, 러시아인은 "자비가 심판보다 높다"고 확신한다. 이 다름을 인식하는 것이 동방 기독교는 러시아에 종교라기 보다는 세계관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언젠가 로버트 히스는 “동방을 향한 비난의 손가락질을 멈춰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서방은 늘 옳고 동방은 틀렸다는 오만과 편견을 우리가 따라가야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1] 이들이 갈라진 이유인 3위일체에 관한 신학적 논쟁과, 신성로마제국의 등장으로 교황이 왕권에 복속된 정치적 이유는 여기서 다루지 않기로 한다.
[2] 오스만 투르크의 침입시 동로마는 서방에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서방은 쳐다보지 않았다.
[3] 그 이후 나폴레옹전쟁과 2차대전까지 서방의 러시아 침공의 역사를 기억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