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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진 Dec 09. 2016

"디자이너님 자유입니다."

#15. 높은 디자인 자유도는 때론 더 어렵다

"이번 프로젝트가 디자인이 정말 중요하거든요. 마음껏 창의력을 발휘해주세요."

"그렇다면 정말 어려운 프로젝트가 되겠네요."

"네? 어째서요? 마음대로 하면 더 편하지 않나요?"


종종 디자인이 정말 중요한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분야를 무조건 디자인에 맞춘다고, 디자인 역량을 '마음껏' 발휘해 줄 것을 요청받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프로젝트는 디자이너의 입장에선 상당히 부담스러우면서도 기피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높은 자유도, 그리고 모든 것을 디자이너에게 맞춰주는 프로젝트가 왜 오히려 더 어렵고 힘든 일이 되는 것일까?





백지에 그림을 그리는 게 가장 어렵다.



하얀 종이를 꺼내놓고 좋은 그림을 그리려고 생각해보자. 어떤 주제와 소재를 잡아야할지부터 복잡한 생각이 머리에 떠오른다.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부담도 다가온다. 하얀 백지처럼, 머릿속도 하얘지기 마련이다. 즉, 오히려 생각할 것이 더 많아지는 것이다. 디자인의 중요한 원리인 배치와 반복, 대비 등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디자인할 재료들이 필요한데 (#10), 그 재료들부터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따져봐도 더 복잡한 일이다.


다시 말해, '마음대로 생각하라'는 것은 작업의 양적인 측면부터가 커짐을 의미한다. 가이드라인 자체를 고민해야 하기 때문에 더 많은 시행착오와 소통이 필요해지며, 이는 단순히 시간적인 투자만을 봐도 업무 자체가 증가함을 의미한다. 무언가를 창작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이 열려있다는 것은, 결코 '더 쉬워짐'을 의미하지 않는다. 


때문에 일반적인 디자인 프로젝트들은 대략적인 기획과 목표 시장,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와 비전, 철학 등이 주어진다. 명시적이지는 않더라도, 어떤 궁극적으로 그리는 목표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되면 목표하는 이미지를 수립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에 기획의 아주 첫 단계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이는 후술할 문제로 이어진다.




이럴 거면 내가 하지.


기획의 초기단계부터 디자인의 끝까지 참여한다는 것은 사실상 하나의 결과물을 전반적으로 손대는 일이다. 물론 이렇게 생성된 디자인을 다시 현실화(제작)하고 배포(유통)하는 일은 그에 못지 않게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며, 존중받아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어떤 생산적인 프로젝트에서 기획 일체를 진행하여 구체화시킨다는 것은 흔히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에 비유될 정도로 많은 애정과 관심, 그리고 창의적인 발상과 구체적인 실행을 위한 경험, 지식 등이 필요한 영역이다.


무엇인가 자유롭게 생각해 프로젝트가 진행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은 제작되어 유통될 수 있는 어떤 대상물을 구상하여 구체적인 기획을 통해 실체화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말과 같은데, 이것은 다수의 업체에서 제품이나 서비스를 가지고 기업을 일으키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창업자의 일과도 비견될 만한 일로, 많은 의사결정과 선택, 그리고 그에 따르는 책임이 녹아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이에 대해 예산을 집행하고 그에 따르는 책임을 질 것은 클라이언트 측이라는 점에서 이런 판단은 성급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서 이렇게 디자인 자유도가 높은 프로젝트를 진행했을 때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나 책임 소지 등이 디자이너에게 몰릴 가능성이 크다. '하라는 대로 했는데 왜 안 되느냐'는 것이다. 책임이 많은 만큼,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해지며 부담이 커지는 것이 당연하다.






적당한 제약조건은 창작의 열쇠가 된다.



한편, '제약조건이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창의성이 떨어진다'는 점 역시도 중요한 요소이다. 적절한 제약조건은 창작자의 집중도를 조절해주며, 이는 창의성의 증대로 이어진다.


이는 위의 '백지'에 대한 언급과도 이어지는데, 백지에 무엇인가 창의적인 발상을 시작하는 것은 많은 훈련이 필요하며, 디자인 능력과도 다른 종류의 능력이기 때문에 별도의 숙련이 필요한 부분이다. 반면 어떤 형태를 그려놓고 이를 토대로 어떤 기능을 조합하는 것은 더 쉬우며, 디자인의 본질과도 어울린다.


디자인이 빛을 발할 때는 주로 주어진 조건들을 잘 이용해 A라는 이익과 B라는 이익을 영리하게 동시에 얻는 경우이다. #10에서 예로 들었던 MS사의 아크마우스 사례처럼, 어떤 폼 팩터(Form factor)가 주어진 상태에서 창의성을 발휘하는 일에 집중하다 보면 기존의 틀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창의적이라고 말하는 새로운 디자인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아무런 제약조건이 없다는 것은 창의성을 발휘할 '틀'이나 '판' 자체를 제공해주지 않음을 의미하며, 이 경우 다수의 사람들은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을 인출하여 활용하는 전략을 취한다. 평소에 관심있어하던 형태, 혹은 디자인 대상의 전형(stereotype)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디선가 많이 보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안정적인 형상을 따라가게 되고, 이미 그 인출과 재구성의 과정에서 지적인 에너지를 활용해 버린 만큼, 창의를 발휘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적절한 단서를 미리 구성한다.



상술한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는, 적절히 디자인에 필요한 단서와 조건 등을 미리 구비해 프로젝트가 시작될 때 상세히 제시하는 것이 좋다. 디자인이 목표로 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어떤 소비자에게 어필하는지, 주요 기능은 어떤 것인지 등이 제시되었을 때 디자이너는 감성적 고려(형태, 색상, 재질)나 소비 시장 접근(가격, 트렌드), 또는 경험(사용자 경험, 인터페이스)에 대해 전략적으로 고민하여 좋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너무 넓은 범위의 고민이 주어지게 되면, 주요한 문제에 집중하지 못하고 헤메게 되어 프로젝트의 낭비를 빚을 가능성이 있다.




Vaccum Jug, Erik Magnussen



물론, 디자이너의 개성과 감성을 존중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이다. 제약조건이 많고 지나치게 판매를 위한 제품을 만들려하다 보면, 오히려 가치가 없는 제품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때문에 어떤 선이 적절한지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부분이다.


다만, 디자인 프로젝트의 특성에 맞추어 디자이너의 결정권한이나 책임 범위 등을 조정해주는 것은 필요하다. 특히 물리적인 프로젝트 시간 등을 고려했을 때 디자이너가 고민할 부분을 집중하고 선택해주는 부분은 디자인 결과물의 품질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위의 Vaccum Jug와 같이 단순한 결과물이라면 물병의 구조를 디자이너 재량에 따라 충분히 바꿔보도록 제안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복잡한 기능과 다양한 형태를 가질 수 있는 제품이라면 선택과 집중을 통해 보다 치밀하게 제안되어야 한다.


또한, 높은 자유도와 예술적 가치가 중요해질수록, 그 가치는 단순히 투입되는 노동과 물리적인 시간이 아닌 결과물의 부가가치에 따라 다르게 책정되어야 할 것이다. 위의 Vaccum Jug가 창출하는 가치는 단순한 물병 디자인의 가치를 훨씬 넘는다. 이는 위의 디자인이 높은 자유도에 따라, 디자이너 개인의 예술적 감성을 충실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더 높은 책임을 감수한 부분이 있는 만큼, 더 존중되어야 하는 부분이며 예술적 가치라는 무형적 가치를 존중하여 더 비용적으로 보상되어야할 부분이다.(#2)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통해 더 자세히 논의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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