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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Nov 28. 2019

D-100 프로젝트 < D-32 >

< 악의 평범성 >


국가기록원이 1980년  5.18 상황의 모습이 담긴 사진첩을 공개했다. 당시 보안사령부가 정보활동을 위해 채증한 것으로, 박지원 의원의 지속적 공개 촉구에 의해 공개된 사진들은 총 1769장이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계엄군, 불타는 광주세무서, 전단을 살포하는 헬기, 무릎 꿇고 있는 여성 시민군들의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들 속에는 폭력 진압을 자행한 신군부의 극악무도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두환아. 내 자식 내놓으라 > 

차량 범퍼에 쓰여있던 문구에는 비통함이 절절히 묻어있다. 

누군가의 자식을 앗아간 그 '두환'은 90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골프도 치고 추징금 좀 대신 내달라는 농도 던진다. 


15년 전인가...(요즘은 웬만하면 10년 전, 20년 전 기억이다...ㅠㅠ)

연희동에 있는 3층짜리 중식당에서 시댁 가족모임이 있던 날이었다. 예약한 3층 룸으로 올라가는데, 경호원 둘이 두 손 모으고 2층 입구에 서있었다. 2층 복도에는 정장과 원피스를 차려입은 아이들 여럿이 재잘거리고 있었다. 누구의 가족모임이기에 경호원까지 서있는가 궁금한 마음에 직원에게 물어보았다.

"전두환 대통령이요..."

룸 안의 그분을 볼 수는 없었지만, 추측하건대 손주들에게 더없이 자상한 할아버지가 아니었을까... 재롱 피는 손주들을 보며 껄껄껄 웃고 무릎 위에 앉은 손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지 않았겠는가...


한나 아렌트는 나치 중령이었던 아이히만의 재판을 본 후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행해진 홀로코스트는 특별히 악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 아니라 관료주의에 물들어 자신의 소임과 책임을 다했을 뿐인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라고 했다. 평범한 가장이었으며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을 뿐이고 죄가 있다면 자신의 행동에 어떤 잘못이 있는지 아무 생각하지 않은 죄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악마적 본성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는 1970년대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진행된 감옥 실험이다.

교도소로 설정된 공간에서 무작위로 교도관과 수감자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관찰한 실험으로,  간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역할에 충실해지고 잔인해졌다. 평범했던 사람들이 외부와의 단절과 권력관계 형성이라는 조건이 주어지자 서슴지 않고 악행을 벌인 것이었다. 2주로 예정됐던 실험은 상황이 악화되면서 6일 만에 중단되었다. 

이 실험은 실제로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서 다시 회자된다. 

이라크의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서 미 육군 헌병들은 이라크인 수감자들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성적 학대까지 했다. 인간의 잔혹함, 추악함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위의 사례들은 인간의 악마적 행동이 환경의 영향이라는데 무게를 두고 있다. 

하지만...

5.18 당시 상부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던 계엄군들을 '악의 평범성'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단순히 권위에 복종하고 자신의 책무를 다하느라 거리의 모든 시민을 폭도라 칭하며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대검으로 찌르는 무차별 진압, 폭력을 자행했던 것인가?

명령을 내렸던 전두환과 신군부세력들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던 환경의 영향이 있던 것일까? 자신들이 정권을 장악, 유지해야만 한다는 역사적 사명이 국민의 자유와 목숨보다 더 숭고한 가치였던가? 

히틀러나 전두환 같은 이들은 평범한 악이 아니라 특별한 악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밑에서 명령에 복종한 이들과는 구별해야 한다며...


인간의 악행에 평범한 것과 특별한 것의 구분이 있을까?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에 무심한 것,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 채 학대를 하는 것, 무엇이 정의로운 일인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것, 자신의 이익이나 행복, 쾌락만을 추구하기 위해 타인의 불행과 고통을 조장 혹은 방관하는 것. 

그것들은 평범하지도 특별하지도 않고, 나쁘다. 

인간의 본성에 의한 것이건 환경에 의한 것이건 그저 나쁘고 악한 것이다.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에는 죽음이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도 타인을 위로하거나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주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에게는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와 자기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결정할 자유가 있으며 척박한 환경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것인지 평범함의 탈을 쓴 악행을 자행할 것인지는 결국 각자의 선택이다. 

선택한 악행에 대해 악의 평범성이니, 관료주의 하에서 책무를 다했다느니, 어쩔 수 없었다느니 하면서 면죄부를 씌워주고 싶지는... 않다는 말이다.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빼앗은 이들이 평범한 삶의 행복을 누리며 살게 내버려두고 싶지는 않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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