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라크루 수요질문 >
하얀 파도가 부서지는 바닷가.
석양 노을이 예쁜 언덕 위 벤치.
귀여운 오두막의 따뜻한 벽난로 앞.
초록 물결 넘실거리는 언덕 위 나무 아래.
영화나 드라마에서 봤음 직한 장면이다. 주인공은 시한부 환자여야 하고 애절한 로맨스는 필수다. 사랑하는 사람과 남은 시간을 함께 보내다가 사랑하는 이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듯 조용히...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나는 T가 분명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인생의 마지막을 어디서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에 대해 답하려면 여러 조건과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첫째, 인생의 마지막을 만나는 순간은 젊었을 때인가, 나이가 들어서인가?
젊었을 때 인생의 마지막을 만나게 된다면 사고나 질병일 텐데, 갑작스러운 사고라면 차 안일 확률이 높을 테고 질병이라면 병원일 수 있겠다.
나이가 들었을 때는 사고, 질병 외에 노환으로 인한 자연사가 가능하다.
둘째,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나는 건강할까, 아플까?
불치병으로 병원 치료 중일지, 손 쓸 수 없는 상태이거나 노환이 진행되어서 요양시설이나 집에 머무는 상황일지, 마지막 순간까지 건강을 유지하고 있을지.
셋째,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내 경제적 상황은 어떨까?
국가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일까? 먹고 자고 이동하는 데 무리가 없는 수준일까? 하고 싶은 것, 필요한 것은 얼마든 할 수 있는 정도일까?
넷째, 내 주변에 사람은 누가 남았을까?
가족마저도 등 돌린 상황일까? 가족 외의 다양한 커뮤니티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로 인해 주변이 늘 북적거릴까? 소중한 친구는 몇이나 남았을까?
다섯째, 시골에 살고 있을까, 도시에 살고 있을까?
여섯째, 원한에 의한 타살 위험에 노출된 상황은 아닐까?
일곱째,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할까, 더 살고 싶다며 발버둥 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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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떠오르며 인생의 마지막을 어디에서 어떻게 보내고 싶은 지는 그리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하나하나 답하다 보니 답은 어쩌면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내가 원할 때, 원하는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루이즈 애런슨의 <나이 듦에 관하여>에서는 '최상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삶에서 무엇이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물으면 사람마다 대답이 다 다르다. 그런데 성찰 주제가 죽음으로 바뀌는 경우, 가치의 순서가 대충 엇비슷해진다. 백이면 백 마음의 준비가 된 상태에서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죽는 것을 최상의 죽음으로 꼽는다는 것이다."
존엄사를 다룬 < 그것은 죽고 싶어서가 아니다 >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무엇이 '좋은 죽음'인가 하면, 첫 번째 고통이 없어야 한다. 두 번째는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가족이나 자신에게 부담되지 않는 죽음. 마지막으로 살아오면서 지켜온 정신적, 물질적 유산을 잘 정리해서 나누고 떠나는 죽음. 물질적인 재산을 남기는 것뿐 아니라 삶의 의미 있는 순간을 기록하고 나눠줄 수 있어야 인간의 존엄한 존재적 가치가 지켜진다."
T의 관점으로 질문에 답하다 보니 F의 마음으로 나의 마지막이 그려진다.
햇살이 꼭 좋을 필요는 없다. 비가 와도 좋고 소복소복 눈이 내려도 좋다. 하루종일 어두컴컴한 날이어도 상관없다. 통돌이 세탁기가 요란하게 돌아가다 잠잠해지는 소리가 들린다. 드럼 세탁기로 바꿨을 수도 있겠다. 몇 살인지도 상관없다.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고 수 십 년 후가 될 수도 있겠다. 가족들은, 워낙 변수가 많으니 그 시각 함께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겠다. 모든 게 다 변할 것들이라서 상상하기 벅차다.
내 인생의 상수는 하나다. 나는 평소처럼 식탁에 앉아 노트북으로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 어제저녁 해 먹었던 음식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며칠 전 보았던 책 리뷰를 쓸지도 모른다. 라라크루 화요갑분 글감이나 수요질문, 금요문장공부 글을 쓰는 중일지도 모른다. 어떤 단어를 쓸까, 단어의 정확한 의미가 뭐였더라? 문장이 어색한데 어떻게 고쳐볼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중 까무룩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글을 쓰다가, 맞춤법 검사를 내가 했던가, 저장을 눌렀던가, 바로 발행을 누를까.. 하다가... 그러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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