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위로는 폭력이 된다
< 라라크루 수요질문 >
❓ 누군가에게 위로를 주었거나 받았던 경험이 있나요?
처서 매직이라는 말이 실감 나게 아침저녁 공기가 선선해진 어느 날, 집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관용적인 표현으로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습니다'라고 쓰려다가 '반가운'을 삭제했습니다. 손님과 제가 했던 끔찍한 전쟁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손님의 노랫소리가 처음 들렸던 건 8월 말, 늦은 밤이었습니다. 20층까지 어떻게 기어 올라왔으며 어디로 들어왔을까 궁금했지만, 그저 살려고 들어왔겠거니 했습니다. 천적이 많은 풀숲보다 안전하다고 생각했으니 기를 쓰고 올라오고 힘겹게 뚫린 철조망 아니 방충망을 건너 들어왔을 겁니다. 화분이 여럿 붙어있는 창가 어딘가에서 울고 있다가 제가 다가가면 잠시 음소거를 하는 모습이 귀여웠습니다.
처음엔 그 소리가 어찌나 정겹던지요. 20여 년 전 떠났던 농활의 고즈넉한 밤 같기도 하고 유난히 숨 막히던 여름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인간을 위로하는 노래 같았습니다. 저녁 식사 시간에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는, 선상 디너의 연주 같기도 했습니다. 날이 선선해진 걸 귀신같이 아는 피조물, 이래서 자연은 경이롭다고 하는구나, 그에 비하면 인간이 오히려 하등동물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가을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20층 아파트 꼭대기까지 전하려고 힘겹게 올라온 귀뚜라미가 마냥 고맙고 기특했습니다. 첫날밤엔 말이죠.
여름의 끝을, 미세한 온도 차이를 귀신같이 알아낸 것과 마찬가지로 동이 터오는 것에도 민감했던 녀석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노래를 멈췄습니다. 숙면을 방해받아 퀭해진 눈이 된 서로를 보면서도 남편과 저는 마냥 즐거웠습니다. 그때까지는요. 선풍기를 틀지 않아도 잘 수 있는 밤이 된 것이 고마웠고, 그 밤은 귀뚜라미와 함께 온 선물이며, 밤새 들린 귀뚜라미 노랫소리는 아직까지는 '심심한 위로'였던 까닭입니다.
이튿날, 귀뚜라미는 정확히 저녁 6시 40분부터 울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의 퇴근을 앞두고 저녁을 준비하는 어스름한 그 시간에 첫울음을 시작하더니 다음 날 새벽까지 12시간을 쉬지 않고 울었습니다. 게다가 장소를 옮겨 안방 앞에 붙은 세탁실에서 울었으니 우리의 밤은 통째로 날아갔습니다. 그때 남편이 처음으로 입을 뗐습니다. "그냥 저렇게 놔둬도 될까?"
제 딴에는 살겠다고 기를 쓰고 올라왔는데 보이지도 않는 녀석을 찾아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행여나 남편이 하고 있을 무서운 상상을 차단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날 저녁부터는 제 귀에도 그 소리가 거슬리기 시작했고 뭔가 조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탁기 뒤쪽에서 소리는 들려오는데 정체는 드러내지 않는 녀석을 향해, 수돗물 호스를 겨누었습니다. 물에 떠서 배수관을 타고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 다시 풀숲에 안착하기를 바랐습니다. 바람대로 됐는지 그날 밤은 조용히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새벽녘이 되자 다시 존재를 드러내며 울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이번에는 뜨거운 물을 부었습니다. '미안하다, 그런데 우리도 좀 살자'며 행위를 정당화시켰습니다.
두 번의 물세례를 맞고도 이 녀석은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랜 고민 끝에 결심한 것 같았습니다. 더 힘차게 울어주기로요. 자신의 위로가 우리에게 가다 말았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날 밤, 집에 혼자 있던 남편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반려 귀뚜리 화났나 봐. 미친 듯이 울어."
늦은 밤 귀가해서 목격한 남편의 몰골은 가관이었습니다. 거실 1인용 소파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저를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당신도 저 소리 들리지?'라는 눈빛으로요. 온 집안이 단 한 마리의 귀뚜라미 울음소리로 가득 찬 경험. 해보셨을까요?
"내 울음소리에 여름이 끝난 줄 알고 좋았지? 진짜 공포는 지금부터 시작이야. 헤헤헤헤...."라며 비열하게 웃는 듯한 귀뚜라미 소리에 저는 결심해야 했습니다. 이 전쟁을 당장 끝내야겠다고요. 세탁기 뒤편을 향해 에프킬라 기관총을 난사한 후 돌아서는 기분은 복잡했습니다. 이 전쟁의 승자는 누구인가. 내가 지키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영화 플래툰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르며 자못 엄숙해졌습니다.
어떤 위로는 폭력이 됩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귀뚜라미의 일방적인 노랫소리가 그러했듯이 상대를 잘 모르면서 혼자만 떠들고 함부로 뱉었던 오만한 위로는 없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상대가 원하는 때, 원하는 만큼, 원하는 방식으로의 위로란 어떤 것인지, 그걸 정확히 알 수 있을지 생각해 봅니다.
평화로운 가을밤을 되찾았습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의 정겨움에 취해 잠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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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 Pixaba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