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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Sep 19. 2024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올해 한가위만 같아라

< 라라크루 수요질문 >

이번 명절을 어떻게 보내셨나요. 예전과 다른 변화를 느끼고 있나요. 혹은 우리 집만의 특색 있는 명절 분위기가 있나요?


나 진짜 I구나?

명절 전날엔 전을 부칩니다. 시어머님이 딱 한 접시거리만 부쳐오라고 하셨지만 고만큼만 부치는 게 더 어려운 일이라 원하는 만큼 부칩니다. 완성품의 15%는 시댁, 15%는 친정, 20%는 1인 가구인 남편과 저의 지인들을 위해 담습니다. 나머지는 두고두고 반찬으로 먹습니다. 차례상을 위해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그다지 귀찮지는 않습니다.

본인이 있으면 걸리적거리기만 할 거라며 가방을 싸들고 사무실에 나간 남편이 원망스럽지도 않았습니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몇 시간 동안 드라마를 실컷 보거나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흥얼거릴 수 있으니 얼마나 좋던지요. 게다가 전 부치기가 끝날 즈음 귀가해서 설거지부터 음식쓰레기 버리기까지 뒤처리를 맡아줬으니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명절 아침엔 시댁에 다녀오고 저녁엔 친정 식구들이 저희 집에 모두 모여 식사를 했습니다. 친정아버지와 남편, 제부, 큰아들 이렇게 넷이서 양주 세병을 깠고 모두 거나해져서야 헤어졌지요. 부엌 가득한 설거지와 어질러진 집안을 청소하려는데 큰아들이 술약속이 있다며 쓱 나갔습니다. "설거지만 해. 청소는 내가 내일 해줄게."라며 남편도 슬금슬금 나갔습니다. 작은 아들이 있었더라도, 그 아이도 나갔겠지요.  


야심한 밤. 혼자 남겨진 그 시간이 얼마나 좋던지요. 혼자 설거지하고 청소까지 하기에 밤 12시는 참 고즈넉한 시간이었습니다. 누구의 도움을 받기보다는 힘들더라도 혼자 있는 시간을 선호하는 저. 찐 I임을 확인한 명절이었습니다.


명절 스트레스가 뭔가요?

저는 명절 스트레스가 없습니다. 특별한 날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스트레스라고 생각하는 순간, 명절엔 당연히 스트레스를 받아야 한다는 틀에 저를 가두는 것 같았거든요.


10년 전인가, 명절스트레스 때문에 가짜 깁스를 한 며느리의 사연을 들은 어머님이 제게 따져 물었습니다.

"미 너도 스트레스받냐? 우리 집처럼 할 일 없는 집이 어디 있냐? 식구들 모여 밥 한 끼 먹고 헤어지는 거. 식구래 봤자 몇 명 되냐? 너희 식구 우리 식구가 다지. 얘기해 봐라. 받냐? 안 받냐?"

신혼 때였다면 서럽고 억울했을 테지만, 이미 내공이 쌓였던 제게는 별 타격이 없었습니다.

"어머니. 그렇게 답을 정해놓고 대놓고 물어보시면 제가 뭐라고 답해요. 그렇게 물어보시는 게 명절 스트레스일지도... 하하하하하."

고부가 같이 웃어넘기는 것으로 대화도, 명절 스트레스도 마무리했습니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20년 후에도...

언제부터인지, 양가 부모님들의 멘트는 서글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내년 추석 때도 이렇게 온 가족이 모여 웃고 떠들 수 있는 걸 볼 수 있으면 좋겠다."라며 눈시울을 붉히시는 아버지. 요즘엔 만날 때마다 옛 이야기 하시며 눈물바람입니다.


"몸이 예전 같지 않아서 밥 한 끼 차리기도 힘드네..."라며 유난히 힘들어하는 어머니.

그래서 올해는 큰딸인 저희 집에서 식사를 준비했습니다만 장소제공만 한 셈이 되어버렸습니다. 바리바리 싸들고 오느라 어머니는 더 번거롭고 힘이 드셨다죠.


"내일이나 기약할 수 있겠니? 이젠 끝났어..."라며 쓴웃음을 짓던 어머님이 한 마디 더 하십니다.

"스포츠 센터 할머니들 말이, 이래 놓고는 죄다 20년 산다더라. 어쩐다니? 하하하하"


있는 푸념 없는 푸념 다 늘어놓으셔도, 당장 내일 어떻게 될 것처럼 몸과 마음이 약해지셨어도 20년은 거뜬히 함께 해주실 분들입니다. 그러니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20년 후에도 딱 올해 한가위만 같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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