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되새기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는 독서

< 샛길독서 - 윤병임 >

by 늘봄유정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여러 경로를 살펴본다. 빠르고 편하게 갈 수 있는 최적 경로를 선택한다. 대부분 큰길 우선이다. 수업을 할 때 어떻게 하면 제한된 시간 안에 학습 목표의 내용을 전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세세하게 설명하고 충분히 들어줄 시간이 언제나 부족하다. 목적과 목표를 달성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좌우를 두리번거리거나 유유자적 경치를 감상할 수 없는 것이며, 깊이 있는 대화로 서로의 감상을 나누는 일도 사치가 된다. 효율성을 극대화시켜 최선의 결과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책도 그렇게 읽고 있다. 읽고 싶은 책은 많은데 책 읽는 속도가 워낙 느린 것이 답답했다. 나흘에 한 권 읽기를 목표로 정해놓고 나니 제법 속도가 붙었다. 어떤 책은 이틀에 한 권을 읽어내기도 했다. 욕심만큼 책을 쌓아놓고 밀린 숙제 하듯이 읽어대고 있다. 그런 와중에 이 책을 만났다.

< 샛길독서 >


'샛길'은 큰길에서 갈라져 나간 작은 길을 뜻한다. 샛길독서란 뭘까? 책에는 "한 권의 책을 중심에 두고 좀 더 깊은 샛길로, 혹은 좀 더 넓은 사잇길로 왔다 갔다 하는 독서법"이라고 나와 있다. 속도를 붙여 무작정 읽어대지 말고 자꾸만 옆길로 새란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책 한 권을 다양하게 체험하고 읽어"보란다. 이제 막 속도가 붙은 경주마의 고삐를 잡아당기는 말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왜 천천히 읽으라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인 윤병임 작가는 중학교 영어 선생님이자 세 아이의 엄마다. 책을 통한 성장의 힘을 믿은 저자는 자녀들에게 책 읽기의 즐거움을 알려주기 위해 고민했다. 엄마들 독서모임을 만들고 아이들과 함께하는 독서 품앗이 모임, 아빠들까지 함께하는 가족 독서 모임으로까지 일을 벌이더니 급기야 200여 명의 마을 사람들과 함께하는 마을 공동체 사업으로 확장했다. '고전', '하브루타', '슬로리딩'이라는 키워드를 이정표 삼아 책을 읽고 활동하다 보면 요즘 학생들이 겪고 있는 어휘력, 문해력, 독해력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단순히 읽는 행위를 넘어 연구하고 탐험하고 꿈꾸는 행위를 작가는 샛길이라고 보았다. 그렇게 샛길을 드나들다 보면 독서라는 행위는 저자의 생각과 경험을 받아들이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생각과 삶에서 새롭게 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위인들이 보여주었던 역사적 업적들을 외우는 것으로 아이들은 행복해지지 않는다. 배운 지식과 사실들이 지금 나의 삶, 나의 생각과 연결되어야 비로소 즐거움과 의미가 생겨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속도에 압도되지 않고 호기심을 따라 개인의 취향과 배움을 고려하며 유연하게 활동할 수 있는 '천천히 읽기, 슬로리딩'은 궁극의 교육 목표 달성에 최적화된 독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 p42


책에는 작가가 수년간 계획하고 수행하고 수정하고 완성한 귀한 자료가 가득하다. 독서 모임의 시작부터 운영에 이르기까지의 노하우뿐 아니라 책을 읽고 할 수 있는 구체적인 활동 예시도 살뜰히 챙겨주었다. '클래스 카드 앱'을 활용한 책 속 어휘 학습, 체험을 먼저 하고 독서를 하는 '거꾸로 샛길', '긴긴밤 긴긴답' 프로젝트, 코딩으로 연결되는 샛길 활동 등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다양한 활동에서 저자의 치열한 분투, 고단했을 삶이 엿보였다.


각자의 샛길에서 신나게 놀더라도 원래 읽던 책으로 반드시 돌아올 것과 각자의 활동을 글로 남길 것을 저자는 강조한다. 그래야 한다고 다그치는 게 아니었다. 스스로 알아서 해보라고 떠미는 것도 아니었다. 샛길마다 짧은 기록을 할 수 있는 활동을 집어넣었다. 모든 활동이 끝나고 글쓰기를 해보자고 했을 때, 뭘 써야 할지 막막한 학생들이 자신의 활동 기록지를 잇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괜찮은 글 한 편을 완성할 수 있는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다. 책과 관련된 활동에 폭 빠져 여기저기 돌아다녔더라도 샛길에서 빠져나와 다시 돌아올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샛길에서의 흔적을 짧게 기록하다 보면 큰길로 돌아왔을 때 완성된 글 한 편을 써낼 수 있다는 것. 꼼꼼하고 단단한 저자의 평소 모습 그대로가 샛길독서를 만들어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책의 내용을 새로운 지식과 연결하고 깊이 탐색하며 샛길을 넘나들어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있다. 그것은 바로 원래 읽고 있던 책으로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야 할 방향과 목표를 잃지 않는 리더의 모습과 닮았다. 동시에 그 어떤 샛길도 결국 내 생각과 연결하여 자신의 진로와 성장의 지표로 삼아야 한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책이 보여주는 새로운 세상이 내 생각과 글로 정리될 때 내 삶의 리더로서 진정한 샛길 활동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 p52


읽고 싶은 책, 읽어야 할 책이 길게 늘어섰지만 가끔은 한 권 한 권 천천히 씹어보기도 해야겠다. 작가에 대해 깊이 연구해 보거나 책 곳곳에 질문을 남겨보는 것도 즐거울 테다. 소설의 배경이 된 곳을 여행하거나 어울릴만한 음악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천천히 산책하듯 샛길을 돌아다니며 독서하다 보면 여태 보지 못했던 재미와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알려준 책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세상을 구원할 K사상을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