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되새기다

내내 같은 강물에 발을 담그고 있었기에

< 소년이 온다 > < 작별하지 않는다 >

by 늘봄유정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역사를 마주하며 한강이 뒤집어버린 질문이다.

과거가 현재를, 죽은 자가 산 자를.

어떻게.

왜.

질문이 이어졌다.


과거와 현재, 산 자와 죽은 자, 가해자와 피해자, 이승과 저승, 뼈와 살, 군인과 시민군, 따뜻한 곳과 추운 곳, 특별히 잔인한 군인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 개인으로서의 인간과 군중으로서의 인간.

책을 읽으면서 자꾸 나누게 됐다. 나와 너, 우리와 그들을. 비단 책뿐일까. 역사의 장면마다 우리는 양극단을 나누고 그들의 선택을 목도한다. 그러면서 상상한다. 나라면? 그 가정을 현재로 가져와 삶의 순간마다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이 나의 역사를, 이웃의 역사를, 국가의 역사를 만든다고 믿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갈등을 빚을 때다. 지금,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내내 광주인 이유다. 그깟 이념이 뭐라고 다 죽여야 했을까. 죽이면 없앨 수 있는 게 생각이라고 믿었을까. 나와 다른 것을 왜 그렇게 못 참는 걸까. 아니다. 그깟 권력이 뭐라고 이념의 핑계를 대며 다 죽여야 했을까. 다 죽이면 권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남보다 높이 서고 싶은 마음을 왜 못 참는 걸까.


95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 소년이 온다 >


어쩌면 우리가 선택이라고 믿었던 것은 우리 주변을 돌고 있는 과거의 영령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상황과 맥락을 이성적으로 판단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어떤 혼이 내게 붙어서라고. 혼들이 그들과 같은 주파수를 가진 사람들 곁에 머물며 쉼 없이 귀에 대고 속삭여 공명을 일으킨 건 아닐까.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라는 것은 태초의 생명에 더해지고 더해지는 이야기의 연장선이 아닐까 상상했다. 그래서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는 건 아닐는지. 우리가 소설을 읽고,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내가 어떤 혼들의 연장선인지를 알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과거는 현재고 현재는 과거다. 산자는 죽은 자고 죽은 자는 산자다. 누가 누구를 돕고 구하는 게 아니라, 그냥 원래부터 하나였던 거다.


< 소년이 온다 >를 읽으며 내 꿈엔 동호가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주위를 맴돌며 날 흔들어줬으면 좋겠다고, 내 귀에 대고 계속 종알종알 얘기해 줬으면 좋겠다고, 난 동호의 역사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짓이기고 쓸어버리는 현장을 외면하거나 돌아서는 대신 그곳에 남았으면. 패배할 줄 알면서도 도청에 남았던 시민군처럼, 훗날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나처럼 한강 작가의 소설을 읽고 심장이 요동치고 목이 뜨거워지고 눈이 자꾸 침침해져 책을 읽을 수 없던 사람, 동호의 얼굴이 궁금해지고 그에게 미안해지는 사람이 있을 테다. 반대로 빨갱이 책이라며 핏대를 올리고 삿대질을 하고 눈에 불을 켜면서 읽지도 않고 불태우는 사람, 도대체 누구의 혼이 붙었는지 궁금해지는 사람도 있을 테다. 역사는 그런 이들이 또 만들어가는 것이리라. 짓밟고 저항하고, 총을 들면 촛불을 들면서. 하지만 언젠가 먼 훗날에는 이쪽의 혼과 저쪽의 혼, 산 자와 죽은 자, 이승과 저승, 군인과 시민군이 공명하는 날도 오지 않을까 하는 꿈을 < 작별하지 않는다 >를 읽으며 꾸었다.


< 소년이 온다 >가 '고통'을 이야기했다면 < 작별하지 않는다 >는 '순환과 연결'을 이야기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라고 했지만, 한강 작가는 말한다. 강물도 과거의 그것과 다르다고 말할 수 없고 우리도 그러하다고. 과거·현재·미래, 나·너·우리, 여기·거기·저기, 무엇 하나 순환과 연결 없이 동떨어져 있는 것이 없다. 그러니 나는 그대를 나와 다른 것이라 여길 수 없고, 지금은 그때를 지금과 다른 것으로 구분할 수 없다. 지금의 눈과 비, 눈물이 그때의 그것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오늘의 함성과 울분이 과거의 그것과 다르다고 할 수 없다. 너는 나로 나는 너로 언젠가는 순환할 테니 모든 선긋기도 무의미하다.


< 작별하지 않는다 > 속 '경하'의 하루는 꽤 험난하다. 그만두고 싶고 피하고 싶은 길이지만, 곧 죽어버릴지 모를 새(사라질지 모를 진실)를 향해 기어이 가야만 하는 길이기에, 진실을 알아내고자 인서의 어머니가 갔던 것과 같은 험난한 여정을 경하는 감수한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식상한 명제를 '눈'과 '물'에서 건져 올리는 작가의 섬세한 고통이 경하에게서 보였고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다. 죽은 자의 길을 산 자가, 과거의 길과 똑같은 현재의 길을 누군가는 걷고, 누군가는 쓰고, 또 누군가는 읽었다. 나를 포함한 역사 속 모든 등장인물이 작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하나였기 때문에.


한강 작가의 소설을 읽으며 이분법으로 나누었던 것들 대신 함께 누려야 할 것들을 찾아보았다.

애국가, 태극기, 광장, 허기, 입맛, 밥, 양심, 눈, 비, 눈물, 사랑.

역사는 그런 것들을 함께 누리는 사람이 많아지는 과정이자 결과가 아닐까. 더 많이 기록하고 더 진하게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천천히 꼭꼭 씹어 먹는 독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