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저 기특한 움직임

by 늘봄유정

⭕ 라라크루 < 별바라기의 목요일에 만난 자연 > 2025. 10. 15.

< 라라크루에서는 목요일마다 별바라기 작가님이 발견한 자연을 글감 삼아 글 쓰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

담쟁이덩굴



그 시작은 언제, 무엇 때문이었을까. 담을 타고 올라가면 해를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한 것, 담 너머엔 어떤 세상이 있는지 궁금해진 것은.


얼마 전 시작한 '도전'을 처음으로 마음에 품은 것은 5년쯤 전이었다. 하고 있는 일이 너무 재미있어서 더 깊이 배우고 싶다는 욕망이 샘솟기 시작했던 터였다. 담쟁이덩굴이 담을 오를 때 그러듯이 개구리 손바닥 같은 흡반을 쫙 펼쳐보았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벽을 향해 손바닥을 '척'하고 붙이려는 순간, 현실의 벽이 보였다. 큰아들의 입시였다. '자식에게 너무 희생하지 말아라, 엄마도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라는 말이 넘치는 세상이지만, 내 꿈보다는 자식의 꿈에 더 많은 자원과 에너지가 집중되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했다.


작은 아이 입시를 마치고도 선뜻 담을 타지 못했다. 현실의 벽 앞에서 내 욕망은 그저 욕심이자 사치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 초, 건강검진을 받고 나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언젠가 생의 끝을 맞을 때 후회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냥 욕심 좀 부릴걸, 사치 좀 부려보지, 까짓것 시원하게 담 타고 올라가 볼걸, 그 끝에 아무것도 없더라도 그저 오르는 즐거움을 맛볼걸...


담쟁이덩굴이 되었다. 담의 끝이 얼마나 높은지 모르고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흡반 하나를 과감하게 붙여놓았다. 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명확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애초에 담쟁이덩굴에게도 꿈이란 게 있을 리 없다. 담쟁이덩굴은 그저 유전자가 프로그래밍한 대로 담을 타는 것이다. 꿈은 없지만, 척박한 환경에서도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방식을 찾아 살아낸다. 기특하게. 애틋하게.


담을 타는 중이다. 담쟁이덩굴과는 달리 생존과 번영, 번식에 도움이 되지 않는 행위를 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기특하다. 서 있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진다. 풍경이 달라지면 이야기도 달라질 테다. 그 이야기가 궁금한 내가, 기특하다.


#라라크루

#라이트라이팅

#라라크루 13기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달을 보며 해를 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