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가족들과 '놀기'

by 늘봄유정

설 명절을 앞두고 SNS에 가족이 함께하는 레크리에이션 영상이 자주 보이기 시작한다.

'눈 가리고 뒤집개를 이용해 바닥에 붙어있는 돈을 주워 쟁반에 담기, 탁구공을 튀겨 용돈이 들어있는 컵 안에 넣기, 손바닥처럼 생긴 쫀드기를 이용해 가족 가운데 놓여있는 돈 빠르게 집어 가기'처럼 용돈을 획득하는 게임이 제일 많다. 아무래도 명절에 가족들이 모이면 용돈이 오고 가기 마련인데, 받는 사람뿐 아니라 주는 사람까지 즐거울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만보기를 착용하고 제한된 시간에 가장 많은 걸음 수 기록하기, 길게 이어 붙인 신문지를 발을 이용해 가장 빨리 가져오기' 같은 팀별 대항전부터, '고무줄에 연결된 여러 갈래 끈을 이용해 컵 옮기기, 나무젓가락을 입에 꽂아 종이컵 전달하기' 같은 협력 게임까지 기상천외한 아이디어의 놀이가 즐비하다.


영상 속 가족들 모두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얼굴에 미소가 한 가득이다. 게임에 졌다는 아쉬움도 잠시, 다른 식구의 도전에 아낌 없는 응원을 보낸다.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기만 했던 스피드 퀴즈, 인물 퀴즈, 좀비 게임 등도 직접 즐기는 대상이 되었다. 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것이다. 이래서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라고 명명했나 보다.


▲AI생성 이미지 ⓒ 오마이뉴스


지난 추석, 모처럼 온 가족이 모였다. 외국에 사는 친지의 방문 덕분이었다. 서른 명 가까운 대가족이 오래간만에 모이는데 먹고 마시는 것만으로는 왠지 부족해 보였다. 유치원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는 사촌 동생에게 의논했고, 동생은 바쁜 와중에도 기꺼이 행사 진행을 맡아주었다.


모임 당일, 동생은 준비해 온 가정용 노래방 마이크를 꺼내 들었고, 가족들은 사회자를 바라보며 둥글게 모여 앉았다. 첫 번째 순서는 사촌 동생의 2학년 딸이 보여주는 바이올린 연주였다. 바이올린을 배운 지 여덟 번밖에 안 됐지만 열정 만큼은 뒤지지 않는다는 소개와 함께 건넌방에서 대기 중이던 연주자가 나왔다.


바이올린 연주자는 칠순을 맞은 작은아버지를 위해 생일축하곡을 서툴지만 진지하게 연주했다. 이어진 순서는 가야금 연주였다. '지역 대회 초등부 우승자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라는 사회자의 재치 넘치는 소개가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사촌 동생의 5학년 딸은 가야금 산조, 밤양갱, 아리랑을 멋지게 연주했다.


연주가 한창이던 그때, 피아노를 잘 치지만 쑥스러움이 많다는 한 조카가 방에 조용히 들어가 버렸다. 마음이 쓰여 어찌해야 하나 고심하는데, 조카는 화이트보드에 "파이팅"이라는 글자를 적어서 들고 나왔다. 연주하는 사촌 언니를 향해 조용하면서도 열정적인 응원을 전하는 충실한 관객 역할을 맡은 것이다.


'열린 음악회'가 끝나고 난 후 이어진 순서는 막내 고모가 오빠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그림 동화 형식으로 만든 영상 감상이었다. AI를 이용해 형제들의 옛날 사진을 동영상으로 만든 작품 감상도 이어졌다. 빛바랜 흑백 사진 속의 앳된 소년 소녀들은 서로를 보며 함박 웃음을 지었다. 당신들의 어린 시절을 영상으로 마주한 아버지와 두 분의 작은아버지, 고모는 연신 눈물을 훔쳤다.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때, 사회자인 사촌 동생은 마이크를 들고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한 말씀씩 부탁드렸다. 손을 내저으며 됐다고 하시면서도 어른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가족들의 화목과 건강에 감사했고, 안녕과 평화를 기원했다. 감동 가득한 음악회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이후 미국에서 온 조카들의 '스타킹' 무대가 이어졌다. 다리 찢기, 태권도, 텀블링, 팔씨름 등 보여줄 수 있는 온갖 재주를 다 뽐냈다. 관객들은 언제 울었나 싶게 박장대소를 했다. 명절에 만나 흔히 하는 잔소리는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현재를 즐기기만 하면 됐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공동 기억이 하나 만들어졌다. 행사를 준비하고 사회를 맡았던 사촌 동생과 그녀의 딸들, 충실한 관객이자 주인공이 되었던 온 가족의 열정적 참여 덕분이었다.


▲AI가 동영상으로 변화시킨 오래된 가족 사진. 무표정이던 가족 사진 속 형제들이 AI 기술로 환하게 웃고 있다. ⓒ 송유정


중고 물건 거래 앱을 열어보면 공원에 모여 경찰과 도둑 게임할 사람, 무궁화꽃 놀이를 할 사람을 모으는 글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보드 게임하실 분, 같이 만나 당구 치실 분' 등, 함께 모여 즐겁게 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 SNS와 온라인 세상에 매몰되고 AI를 벗 삼아 사는 줄 알았던 사람들도 때로는 오프라인에서 진짜 사람을 만나 놀고 싶어 한다.


남들과도 그렇게 신나게 노는데, 가족과 함께 놀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물론, 가족보다 생판 모르는 남이 더 낫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명절 때 가족 폭력 신고가 급증하고 명절 직후 이혼율이 급증한다는 통계가 보여주듯이 말이다. 차례상 차리기, 반복되는 잔소리, 정치 종교적 견해와 관련된 예민한 질문 등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지지와 응원을 보내주었으면 하는 존재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존재'로 전락 시킨다.


상처와 아픔, 불만과 갈등이 없는 가족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이따금 떠올릴 수 있는 즐거운 기억 몇 개만으로도 상처는 봉합 되고 갈등은 옅어질 수 있다. 눈 마주치고 살 부대끼며 웃는 하루를 보내다 보면, 인생사 뭐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게 있나 싶어지고, 그래도 가족밖에 없다는 생각까지 미치게 된다. 소설 <모모>의 작가 미하엘 엔데는 니체의 문장을 변형하여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아이가 숨어 있다. 그 아이는 놀고 싶어 한다."


이번 명절엔, 소설 <모모>에서처럼 시간의 도둑들에게 쫓기며 놀이와 여유를 잃어버린 어른들에게 내면의 아이를 되찾아주는 프로젝트를 해보면 어떨까? 돌아가며 장기를 뽐내는 작은 공연이나 간단한 놀이를 준비해 보는 것이다.


가족들의 빛바랜 사진첩을 가운데 펼쳐두고 두런두런 그 시절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겠다. 마음이 말랑해지고 놀이에 빠지다 보면 입시, 취업, 결혼, 정치, 종교 이야기를 할 새가 없을 것이다. 그림자처럼 음식을 차리고 뒤치다꺼리를 하던 이들에게 일하지 말고 같이 놀자고 조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다시, 가족이 되는 것이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서도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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