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사과를 받아줘~ >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뭘 잘못했는데?"
"음... 다... 다 잘못했어."
"우리 헤어져!"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 채 무턱대고 사과했던 어떤 이의 최후...
위기만 모면하면 다시 아무 일 없이 관계가 회복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실수이다. 상대에 대한 예의,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없을 때 이런 건성 사과를 하게 되는 게 아닐는지...
며칠 전, 중3인 작은 아이의 학교 합창대회가 있었다.
반 아이들 모두 크리스마스를 소재로 하는 노래와 퍼포먼스를 준비해 같은 학년끼리 겨루는 행사였다. 말이 대회지 반단합대회의 성격이 더 강했고 준비를 하는 과정이 더 재미있는 이벤트이다. 퍼포먼스에서 작은 아이가 여장을 하기로 했다는 얘기를 듣고 내 마음이 분주해졌었다. 반 여자아이들이 화장을 해준다고는 했지만 자고로 여장이라 하면 가발이나 스커트 정도는 착용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이는 가발과 스커트를 강력하게 거부했다. 화장하는 정도까지는 자신도 용납하지만 그 이상은 싫다고 했다.
"그래도, 여장인데 스커트 정도는 입어줘야지~~ 옛날에 형 친구 한 명이 남장여장 콘테스트에 나가서 얼마나 제대로 여장했었는지 알잖아~~"
"그건, 남들도 다 여장하고 나오는 자리니까 그렇지. 난 우리 반에서 혼자 여장을 하는 상황인데 뭘 그렇게까지 해~"
합창대회 당일 아침, 기어이 난 아이의 가방에 스커트 하나를 넣어주었고 꼭 입으라고 당부를 했다. 그러마하고 집을 나선 아이가 못 미더워 평소 잘 알고 지내는 반 아이 두 명에게 문자까지 보내 놓았다.
하교 후 게임을 하는 아이에게 "어떻게 했어? 치마는 입었어? 화장도 했어? 가발도 쓸 걸 그랬나?" 하며 혼자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는 게임 화면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어", "어"라는 건성 대답만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몰랐다. 아이가 화난 것을...
저녁식사 후 둘이 앉아 빨래를 개면서 "더 여성스럽게 할걸 그랬나?" 했더니 아이가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친구들한테 문자 보낼 것까지는 없었잖아~"
"네가 안 입을까 봐 그랬지..."
"내가 안 입는다고 했는데!"
"이왕 하는 거 재밌게 하면 좋잖아~"
"보는 사람들이나 재밌지. 난 안 재밌다고!"
"왜 그렇게 지랄 맞아~~"
이때까지도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한 나는 혼자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는데...
"내가... 지랄 맞은 거야?"
건조하면서도 날카로운 한마디가 돌아왔다.
"......."
"어젯밤부터 화가 나 있었다고!"
"..... 미안해..."
큰아이가 심한 사춘기를 겪던 때에 아직 초등학교 3학년이던 작은아이는 내게 말했었다.
"엄마... 난 사춘기 때 형처럼 저렇게 엄마 힘들게 하지 않을게요~"
그 말 때문이었던 걸까? 작은 아이는 나에게 반항 한번 하지 않았다. 간혹 까칠해 보이기는 했어도 딱 거기까지였다. 큰아이처럼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는 일도, 며칠 동안 엄마와 말을 안 하는 일도 없었다. 엄마가 조금이라도 우울해하는 것 같으면 눈치를 보고 이유를 물었으며 엄마를 위로해주었다. 엄마의 요구를 묵묵히 따라주었고 큰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몰랐었다.
엄마의 심한 장난에도 그저 허허실실, 오버스러운 엄마의 요구도 묵묵히 들어주던 아이가 많은 것을 참고 넘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무뚝뚝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실은 자신의 감정을 많이 억누르고 있었다는 것을...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이, 작은 아이를 대하는 '나'를 두고 하는 말임을...
감사했다.
지금이라도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내게 표현해주어서.
화가 났다고. 아주 많이 화가 났다고.
깨달았다.
지랄 맞은 건 아이가 아니라 나였는데, 그걸 잊고 또 오만함을 떨었다는 것을.
"큰아이의 혹독한 사춘기를 겪으며 난 이미 충분히 단단해지고 성숙한 엄마가 되었다"라는 자만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사과한다.
의도치 않은 잘못이었다는 구차한 변명이나 핑계 대신,
진정성 있고 구체적이며 진심 어린 사과...
"미안해...
그렇게까지 화난 줄 몰랐어...
엄마가 널 애기라고만 생각하고 엄마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했네...
너를 존중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 미안해. 내 사과를 받아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