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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May 02. 2020

꼬꼬시

준비, 요이, 땅! (일본 잔재이며 입에 붙어버렸으나 마땅히 준비, 땅!으로 고쳐져야 할...)

Ready, Get set, Go!

학창 시절 달리기 출발선에만 서면 심장 박동이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도저히 발이 떨어질 것 같지 않던 초조함은 누구나 갖고 있을 기억이다. 잘 뛰건 못 뛰건 상황은 같다. 출발 총소리를 기다리는 그 몇 초가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지고 총이 쏴지고서도 또 영점 몇 초간은 슬로모션처럼 내 몸의 움직임을 감지했던 것 같다. '시작', '출발'에 대한 나의 이야기는 이렇게 식상한 기억에서 시작한다.     


"난 밤에 잠들기가 너무 무서워. 눈을 감았다가 뜨면 아침인 게 너무 싫어."

"왜? 아침이 되는 게 뭐가 무서워? 엄청 숙면을 취하나 보네~ 눈을 감았다 뜨면 바로 아침인걸 보니."

"눈 뜨자마자 아침밥은 뭐해 먹이나, 저녁은 뭘 준비하나 걱정하는 거, 매일매일 밥 생각으로 반복되는 삶이 너무 싫다..."

20년 차 주부인 친구의 푸념이다.

지저귀는 새소리, 상쾌한 공기, 맑은 하늘, 새로운 출발, 시작, 희망 등 '아침'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온갖 긍정적인 이미지들이 여지없이 깨진 삶. 매일 아침 눈뜨면 새끼들과 남편의 끼니 걱정으로 시작되는 하루. 그것이 비단 그 친구만의 몫은 아닐 것이다. '시작'이라는 단어의 무게는 때로는 감당하기 버겁고 두렵다. 그래서 일부러 긍정의 이미지들을 덕지덕지 붙여놓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이 설레는 이유는, 우리는 저마다 시작을 하지 않았다면 맛보지 못했을 경험과 추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고만 보더라도 '내 아이 첫 이유식', '내 아이 첫 학습지', '우리의 첫 보금자리'라며 저마다의 기억 소환을 자극하지 않던가?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나의 200일쯤 전을 돌이켜보자. 브런치 작가 등록을 마치고 첫 글을 쓰기 며칠 전부터 부정맥이 시작되었다. '뭐에 대해 쓰지? 매일 어떻게 쓰지? 아무도 안 읽으면 어쩌지? 반응이 안 좋으면 어쩌지?' 끄집어낼 수 있는 온갖 걱정들을 불러내니 심장도 생각도 엇박에 마구잡이식이 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불안한 시작을 글로 알렸고 조금씩 안정되는 마음도 글로 표현해 보았다. 조회, 공감, 공유를 알리는 숫자에 일희일비했고 그것이 동력이 되어 100일 글쓰기를 완성했다. 그리고 또다시 100일 글쓰기를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은 또 다른 시작을 몰고 온다. 일명 꼬꼬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시작...     


브런치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도록 이끈 것은 디베이트였다. 4년여간 디베이트 강사로 활동하면서 배우고 경험한 것, 느낀 것들이 나를 다져주었고 말로만 떠들던 것들을 글로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게 해 주었다. 인문학 수업을 기웃거리다가 만나게 된 디베이트 전문가 과정. 그 과정의 첫 디베이트 실습 때  E.H.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고 토론을 하는데, 입에서 나가는 게 말은 말이되 무슨 말인지 도통 몰랐다. 귀로 들어오는 게 상대의 말이긴 하되 반대편 귀로 나가버리려는 걸 잡고 '뭐라고?'라고 되물어도 여전히 모를 말들이었다. 그렇게 첫 디베이트가 끝나고 아직 뛰고 있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집으로 가던 길의 희열을 잊을 수 없다. 그 희열에 중독돼 책을 읽고 가르치고 글을 쓰고 있다.


매 순간의 시작은, 내 삶의 모든 첫 경험은 내 살아온 날들에 대한 보상이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하며 삶과 사회에 대해 풀리지 않고 쌓여만 가던 의문들, 영어학원 선생님을 하며 가르친다는 것이 나를 얼마나 성장시키는지 알게 된 경험, 집에서 하는 요리라도 전문성을 더하고 싶다는 열망에 시작하게 된 전통음식 전문가 과정, 내 인생 최고의 쓴맛을 알게 해 준 남편과의 치킨집 운영... 내 삶의 이 모든 순간들은 무엇하나 온전히 저 혼자 시작한 것이 없고 무엇하나 오늘의 나와 무관한 것이 없으며 무엇하나 버릴 것이 없다.      

아침에 눈뜨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시작이지만 그마저도 어제의 나에 대한 보상이요 내일의 나에게 주기 위한 선물이다. 그리하여 내게 시작이란, ‘과거, 현재, 미래, 어제, 오늘, 내일’과 동의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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