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크! 브레이크! 브레이크~~~~~~!"
"엄마 목소리 때문에 더 놀라겠어~!"
"미안 미안. 근데 왜 브레이크를 그렇게 늦게 밟아~~"
차 꽁무니에 '극한 초보' 스티커를 붙이고 매일 30분 이상 큰아이의 운전연습에 동행하고 있다. 특별한 행선지가 없으니 함께 장 보러 가거나 작은 아이 학원 데려다 주기 정도가 다이지만 매일 반복하여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덕분에 큰아이는 운전대를 잡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졌고 후진주차는 한 번에 할 수 있게 되었다.
조수석에 앉아 천장 손잡이를 꼭 잡고 있는 엄마가 못마땅한 아들은 "이제, 손 내릴 때도 되지 않았어?"라고 요청하지만 아직은 손을 완전히 자유롭게 놔두기엔 불안하다. 어린 시절 두 발 자전거를 처음 가르칠 때와 다르지 않다.
아이가 대여섯 살 쯤이 되면 이제는 보조바퀴를 떼고 두 발 자전거를 타고 싶다는, 그 나이 또래들의 정확한 수순을 따르는 아이를 위해 하루를 봉사해야 하는 날이 온다. 핸들 중심을 잡으면서 페달도 구르는 일이 동시에 일어나기까지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다. 감각을 익히기까지 뒷좌석을 단단히 움켜쥐고 자전거를 쫓아가야 한다. 살짝살짝 손을 놓아가면서 감을 잡았는지를 확인해본다. 아직 움직임이 불안하면 다시 재빠르게 잡아주어야 넘어지지 않는다. '넘어지면서 배우는 것 아닌가?'라고 하겠지만 그건 나중 단계다. 핸들의 감각을 어느 정도 잡은 것 같다 싶으면 가끔씩 손을 놓는다. 아주 자연스럽게, 아이가 알아채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자전거 뒤를 바짝 쫓아 뛰어야 한다. 중심을 잃고 쓰러질 것 같으면 다시 잡아준다. 아이는 누군가 여전히 자신의 뒤를 든든히 봐주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믿음이 무너지면 불안해지고 불안해지면 핸들과 페달에 집중할 수 없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두 아이 모두 반나절만에 성공시킨 어머니로써 일반화를 시켜보자면, 그렇게 몇 시간만 수고하면 아이는 반나절 안에 자전거를 탈 수 있다. 엄마가 손을 놓았어도 10미터 이상 혼자 주행했음을 알게되고, 뒤에서 잡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꽈당' 넘어지지만 이는 성공을 자축하는 세리머니다. 그다음부터는 살짝 잡았다 바로 놓아도 혼자서 잘 간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남겨진 나는, 흐뭇하면서도 아쉽다. 이제 더 이상 내 손은 필요 없다. 간혹 넘어지기도 하고 무릎이 까지기도 하지만 이때부터는 불안해하지도 않고 주저앉지도 않는다. 다시 자전거를 세우고 페달을 구르며 핸들을 조정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조수석에 앉아 천장 손잡이를 잡지 않을 날도, 아예 자동차 키만 건넬 날도 머지않았다. 대견하면서도 아쉽다. 아들과 똑같이 스무 살에 운전면허를 따고 엄마 차로 주행 연습을 하던 시절, 내가 운전하는 차 조수석에 앉아있던 엄마의 모습이 아련하다. "왜 그렇게 핸들을 가만히 두지 않고 계속 왼쪽 오른쪽 움직이면서 운전하니?"라고 타박하던 엄마의 잔소리도 생각난다. 운전은 못하면서 잔소리는 듣기 싫었던 못된 딸. 하지만 덕분에 20년 무사고로 운전을 하고 있는 것일 게다. 그렇게 든든한 뒷배가 있어 잘 살아온 것일 테다.
줄탁동시.
어미닭과 병아리가 동시에 알을 쪼아 깨뜨리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새는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는 소설 <데미안>의 문장과 함께 떠오르는 성어이기도 하다. 나 혼자 잘나서 알을 깨고 삶을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그 시작에는 늘 누군가가 함께해주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망각한다. 그러다가 이렇게 누군가의 시작에 내 손을 내어주게 된 날, 불현듯 내게도 그런 존재가 있었음에 감사하게 되고 잊고 살았음에 죄송스러운 날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