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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May 08. 2020

저는 외국인입니다.

1991년 12월 23일.

우리 가족이 처음 미국으로 해외여행이란 걸 갔던 날이다. 중학교 3학년 때였는데, 돌이켜보니 아버지가 하시던 건설업이 호황이었나 보다. 아니면, 전재산을 가족 해외여행에 올인하셨든지...

당시 일기장을 찾아보니 한 달 동안의 미국 여행이 상세히 적혀있었다. 애리조나에 거주하시는 고모와 작은아버지 댁을 차례차례 방문하고 서부 현지 투어 일정과 감흥을 꼼꼼히 적어둔 29년 전의 '나'를 칭찬했다. 막연하게 '좋았어지...'가 아니라 어디를 가서 무엇을 보고 먹고 듣고 느꼈는지에 대한 16살 청소년의 기록. 오글거리지만 나름의 재미가 있다. 

12월 23일 월요일 흐리고 비
지금 여기는 비행기 안이다. 난데없이 무슨 비행기 안인가? 사실 1년 전부터 계획되었던 일이다. 이 비행기는 미국 로스앤젤레스행으로 서울 김포공항에서 7시 20분에 출발하는 대한항공 006편이다. 수원 촌놈이 미국이 왠말인가마는 벼르고 별렀던 일이니만치 준비도 대단했다. 짐을 줄이라는 아버지의 말씀 아래 겨우 챙긴 것이 큰 가방 4개. 이 나이에 벌써 미국 여행이라니 '나는 참 좋은 부모를 만났다'하는 자랑스러움과 함께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민망하고 송구스럽다'라는 미안함도 적잖이 있다. 하지만 이게 바로 각기 다른 사람들의 인생이리라...

여행 시작 전부터 여행을 마친 후까지 아버지는 신신당부하셨었다. 친구들에게 해외여행 다녀왔다고 자랑하지 말라고. 가진 자도 아닌 우리가 괜한 허영심에 젖는 것을 경계하신 가르침을 여전히 깊이 새기고 있다.

- 인종 시장이라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별별 사람이 다 있다. 무척 이상한 것은 신체 모습이 무척 우습다는 것이다. 머리는 조막만 하고 히프는 아주 크고 다리는 가늘다. 한 부부의 경우 여자의 히프가 남자의 두배나 된다. (23일)

- 나는 한 가지 크게 깨달은 바가 있다. 영어가 너무나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남들이 영어로 말하는 소리를 들으니 영어를 막 하고 싶다.(24일)

 - 하루하루가 즐겁고 신기한 것 투성이다.(25일) 

- 애리조나가 사막도시라서 말을 많이 키워서인지 승마장도 많다.... 지난해 민속촌에서 700원을 주고 짧은 거리를 누가 잡아주는 말을 탔던 나는 나 혼자서 한 시간이나 타본 적이 처음이다. 서부의 사나이라도 된 기분. (27일) 

 - 이곳은 청소년들을 위한 각종 오락시설부터 문화시설이 다양하게 준비되어있다. 또한 그것들을 누릴 여가시간도 무척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이곳에서 나는 너무나도 초라한 존재다. 한국에서는 운동, 노래도 꽤 하고 글도 잘 쓰는 편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다 잘하는 것 같다.... 역시 미국이 선진국이라 불릴만하다는 생각이 여기저기 고개 돌릴 때마다 난다.(92년 1월 1일) 

 - 미국이란 나라가 참 좋은 나라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흑인 인종차별도 아직 심하다고 하고, 경제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 같다. 미국 곳곳에 일본 제품이 이미 깊이 파고들었다. 우리가 쓰지 않으면 될 것을 제품이 좋다는 이유로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정해놓고 거기서 나오면 모든 서비스를 중단한단다. 겉으로는 미국의 호의가 보이지만 내면에는 인디언들의 입을 막으려는 얕은 수작이다....... 미국을 많이 다녀보진 않았지만 느낀 것은 많다. 역시 나는 내 나라 한국에서 발전하는 나라를 보며 고칠 것은 고치며 성실히 살아가야겠다.(1월 4일)  

- 이곳은 한국이다.... 좋건 싫건 내일부터는 학원을 다니고 고등학교 준비도 해야 한다. 되게 재미없을 것 같다.(1월 19일)


당시 한국에서는 볼 수없고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에 대해 호기심 어린 눈을 한 16살의 동양 소녀. 

어디로 눈을 돌려도 외국인 천지인 미국 땅 한가운데에 서있다는 것에 흥분해 있던 나. 그런 나의 머리를 꽝 하고 내리쳤던 한마디가 잊히지 않는다.

"Are you a foreigner?"

난 당황해서 답했다. 

"NO, I'm not."

상대가 다시 물었다. 

"Oh! Are you American?"

뭐라는 거야? 생각하며 답했다.

"No. I'm Korean."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상한 놈 다 보겠다던 상대의 표정. 그 순간 깨달았다. 미국 땅에서 난, 외국인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해야 하나? 상대의 관점에서는 내가 외국인이라는 그 간단한 사실을 여행지 한가운데에 가서야 깨달았다. 내 첫 해외여행의 큰 교훈이다.



* 어버이날을 맞아, 자식에게 '경험'이라는 소중하고 큰 자산을 선물해주신 아버지, 어머니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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