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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Jun 30. 2020

당신의 눈부신 삶을 응원합니다.

"이달 말로 내 생에 정기적인 경제활동이 종료되었으며 이제부터는 간헐적 활동으로 전환함을 알려주마. 그동안 풍요롭지는 않아도 나름대로 잘 지내왔다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욕심 없이 살다 갈란다. 그리들 알고 있어라. 모두들 사랑한다."


뜬금없는 고백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올해로 일흔셋이신 아버지의 셀프 퇴직 문자였지요. 40여 년을 한결같이 건설업에 종사하시며 일요일도 쉼 없이 달려오신 분이었습니다. 퇴직금도 없고 퇴임식도 없이 초라하게 혼자만의 마무리를 준비하셨나 봅니다.


토목건축과를 졸업해 대기업에 취직하고 몇 년간 이라크 건설현장을 지키던 청년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린 딸은 아버지가 보내주는 엽서들을 보며 아빠를 기다렸지요.

사주팔자에 사업은 없다는 아내의 만류에도 고집스럽게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공사대금을 떼인 적도 있고 현장에서 추락사가 발생해 책임자로 고초를 겪으신 적도 있습니다.

종합건설면허를 취득해 굵직한 공사를 맡으며 승승장구하시던 시절도 있었지요. 큰딸의 남자 친구가 처음 인사 왔던 날, 경기도에서 매출 3위 한 건설회사라며 거나하게 취해 자랑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IMF 때 부도를 맞아 집이고 회사고 모두 날아가버렸어도 자식들 앞에서 눈물 한번 보이지 않으셨던 아버지. 묵묵히 할 수 있는 일을 하시고 찾을 수 있는 온갖 방법을 찾아 가족들을 다시 한집에 모으기까지 당신이 겪었을 세상을 저는 짐작도 못합니다.


여름이면 뙤약볕에 머릿속까지 검게 그을려 아내가 해준 시원한 오이냉국이 아니면 한낮으로 달아오른 몸을 어찌할 수 없었던 노동자였다가,

양복을 쫙 빼입고 과천 정부종합청사를 찾아갔더니 경비가 묻지도 않고 길을 내어주더라며 허세를 부리시던 종합건설회사 대표였다가...

그렇게 롤러코스터 같던 삶을 견뎌내느라 짙고 풍성했던 숯댕이 눈썹은 희고 듬성듬성해졌습니다.

곧고 근육이 탄탄하던 몸뚱이는 굽고 말랐습니다.

일요일에도 새벽같이 나가시더니 이제는 느지막이 일어나 종일 TV만 보십니다. 그렇게 일요일만이라도 쉬시기를 바랐는데, 정작 집에서 쉬시니 안식구들은 안절부절입니다. 어디가 편찮으신가, 무슨 일이 있으신가...

일흔을 넘기도록 열심히 일하셨으니 좀 쉬어보겠다는데 그걸 또 편편치 않게 해 드렸습니다.


깊고 길게 늘어난 주름, 몇 가닥인지 셀 수 있을 만큼 줄어든 머리숱, 앙상하게 마른 종아리, 기운 하나 없이 앉아있는 굽은 등, 시큰거려 덮개를 씌운 손가락, 통풍으로 튀어나온 엄지발가락 뼈.

그들이 있어 이렇게 잘 자랐음을 새삼 느끼는 날입니다.

그들이 있어 이렇게 편히 글이랍시고 쓰고 있고,

그들이 있어 이렇게 남편과 자식 갖추고 살고 있습니다.

그들을 힘겹게 끌어안고서 하루하루 버티고 오늘을 맞이한 당신이 있어 제 삶이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이제는 당신이 빛나실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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