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봄유정 Sep 20. 2020

나만 해피엔딩이라, 미안해 꽃게야...

동생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언니네 꽃게는 상태 괜찮았어?"

문자에서도 느껴지는 다급함. 바로 전화를 걸었다. 

"언니네 배송 온건 괜찮았구나? 우리 것도 괜찮았거든... 근데 작은집 보낸 건 별로였나 봐.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가 선물을 보내면서 보내는 사람을 안 적으셨나 봐. 작은댁에서는 누가 보낸 건지 모르니 뜯어보지도 못하고 베란다에 내놨다가 오늘 아침에서야 내막을 알고 뜯어보셨는데 이미 거의 다 상해있었나 봐. 먹지도 못하고 버렸다네...  OO 이한테 전화 왔더라고. 큰아버지 큰어머니한테 잘 먹었다고 인사드리기는 했지만 언니들 받은 건 상태 괜찮았냐고..."


아버지는 명절을 앞두고 딸네 집과 작은집에 꽃게 3kg을 선물로 보내셨다. 산지에서 바로 잡아 보내준다는 곳을 수소문해 원주 고모댁까지 총 네 집의 주소를 불러주고 주문을 하셨다. 아버지의 불찰인지 업체의 실수인지 '받는 사람'란에 쓰인 이름과 주소가 '보내는 사람'위치에도 똑같이 쓰이게 됐다. 꽃게가 올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나와 달리 전혀 알지 못했던 작은댁, 고모댁에서는 난데없이 날아온 꽃게 한 박스를 두고 보낸 사람을 찾느라 애를 먹었던 것이다. 냉장고에라도 넣었다면 몇 마리는 건졌을 것을 실온에 방치해둔 작은집은 결국 싱싱한 꽃게 맛을 보시지 못했다. 

이 사실을 알고 가만히 계실 엄마가 아니었다. 당장 아버지에게 싸우자고 덤빌 수는 없으니 답답하고 짜증스러운 마음을 작은딸에게 풀어놓으신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아버지와 한바탕 하고 난 후였을지도...


동생이 엄마에게 들었을 얘기는 뻔했다.

"니 아빠 때문에 내가 미쳐. 아니 생물을 선물하면서 보낸 사람을 안 알리면 어쩌자는 거니? 전화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니? 누가 보냈는지 모르니 함부로 못 먹었겠지... 내가 그래서 항상 답답한 거야. 왜 말을 안 하냐고 말을... 누가 이 속을 아니. 너네 아빠처럼 답답한 사람이랑 사는 내 속을..."

꼭 해야 할 말까지도 아끼시는 아버지 때문에 일어난 사단이기는 하지만, 아버지 속도 말이 아니겠다 싶었다. 돈 들여 선물해놓고는 생색도 못 내고 마누라한테는 욕만 한 바가지 얻어먹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어제 업체에서 왔던 배송 문자가 오늘 또 왔다? 설마 오늘 또 배송 오는 건 아니겠지?"

"뭐라고? 에이 설마 그런 실수까지 하겠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 게... 조황이 좋지 않아서 발송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문자가 왔었는데 어제 꽃게가 왔던 거거든... 잡히는 대로 보내겠다고 했었는데 이미 발송한걸 미처 모르고 오늘 또 보낸걸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래? 지켜봐야겠네... "


동생과 밑도 끝도 없는 기대를 품으며 통화를 마치던 무렵, 거짓말처럼 꽃게가 집 앞에 있었다. 우리 집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선물했던 네 집에 모두 한 박스씩... 이건 뭐 마트 1+1 행사도 아니고... 

다 늦은 저녁이라 업체에 전화해도 소용이 없었고 생물이라 반송하면 버리는 게 될 테니 어쩔 수 없이 먹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작은집 사촌동생에게도 전화가 왔다. 실하고 싱싱한 꽃게가 배송 왔노라고. 잘 먹겠다고. 

내게 배송 온 꽃게는 친정집에 가져다 드리기로 했다. 선물만 했지 정작 부모님은 맛도 못 보셨기도 했거니와 꽃게 하나로 사달이 난 두 분의 분위기도 풀어드릴 겸... 


"아버지~ 덕분에 올해 꽃게 실컷 먹네요~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대~? 하하하하" 

생색 안 난 선물 때문에 주눅 들어있던 아버지도 그제야 얼굴이 펴지셨고, 짜증이 머리끝까지 났던 어머니도 마음이 풀어지셨다. 고무장갑을 끼고 꽃게를 깨끗이 씻어 찜통에 찌는 큰딸, 노부부의 쓸쓸하고 냉랭했을 저녁식사자리에 재잘재잘 떠들어대며 함께 꽃게를 발라먹는 큰딸, 바로 '나' 덕분에 부모님은 모처럼 맛있는 저녁을 드셨다고 했다. 늘 소화가 안되던 엄마는 "오늘 어쩜 이렇게 소주도 달고 게도 달지? 맛있게 잘 먹었네." 하셨고, 그런 어머니를 보며 아버지는 "너 우리 앞집으로 이사 와서 우리 기쁨조 해라~"라고 하셨다. 무뚝뚝하기로 유명하던 나였는데 오늘은 너스레도 잘 떨었다. 사실은 꽃게 발라먹는 게 귀찮아서 어제 가족들만 쪄주고 나는 말았었는데 오늘은 재롱부리듯 두 마리나 열심히 파먹었다. 


어머니가 부엌에 가신 틈을 타 아버지께 조용히 말했다.

"해피엔딩으로 끝나서 다행이에요~~"

아버지도 눈을 찡긋거리시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오래간만에 딸 노릇 한 것 같아 나도 뿌듯하고, 꿀맛 같던 식사로 엄마도 행복하고, 결과적으로는 생색 제대로 낸 선물 덕에 아빠도 안도하고... 이 정도면 해피엔딩...


싱싱할 때 더 먹으라며 싸주신 펄덕펄덕 살아있는 게 몇 마리로 집에 돌아오자마자 양념게장을 만들기로 했다. 봄철에 나오는 암꽃게는 간장게장에 알맞고 가을 숫꽃게는 양념게장에 맞는다고 했다. 간장게장은 여러 번 담가봤지만 양념게장은 처음이었다. 검색해보니 인플루언서마다 각기 다른 팁을 올렸다. 생물 꽃게는 손질하기 어려우니 냉동실에 기절시켰다가 자르라는 사람, 싱싱한 걸 사놓고 왜 냉동실에 넣느냐는 사람, 그러지 말고 단촛물에 담가 놓으라는 사람. 모두 제각각이었다. 


그냥 해볼까? 하다가 금세 맘을 바꿨다. 꽃게가 '너무' 살아있었다. 살아있는걸 찜통에 잘도 쩌먹더니 뭔 소리냐 싶겠지만... 찜통에 넣으면서 얼마나 많은 '미안해'를 말했는지 모른다. 변명이다. 미안하다면서 살아있는 놈을 뜨거운 찜통에 가둬놓고 냉정하게 뚜껑을 덮어버렸으면서. 안에서 파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또 미안하다고 했지만 다 쩌진 꽃게를 야무지게 발라먹었으면서. 


그런 냉혈한이 양념게장을 하기 위해 산채로 손질하는 건 도저히 엄두가 안 났다. 하는 수 없이 냉동실에 넣었다가 한 시간 후에 꺼냈다. 언뜻 보니 기절한 것 같았다. 겉에는 살짝 살얼음도 생겼고.

1단계. 큰 집게발을 제외한 작은 발들의 끝부분을 가위로 자르세요. 어차피 살도 없고 먹을 때 성가시기만 해요.

블로거의 말대로 했을 뿐인데, 가위로 발 끝을 잘랐더니 게가 파닥 움직였다. 기절했다가 살아난 것이다. 이를 어쩐다. 다시 냉동실에 넣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런데, 이젠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새벽 한 시였다. 

2단계. 게의 눈을 가위로 자르세요. 

아... 눈을 자르란다. 씻을 때 보니 눈이 보통 좋은 게 아니었는데... 자기 몸 쪽으로 내 손이 조금만 움직여도 잽싸게 집게발로 덥석 물었었는데... 눈을 잘라내란다. 일제강점기 때 고문 순사가 이렇게 잔인했을까... 살아있는 생물의 눈을...

3단계. 몸통과 등딱지를 분리하세요.

안 떼어졌다. 마지막 안간힘을 쓰면서 등껍질을 붙잡고 있나 싶을 정도로 단단하게 붙어있었다. 그악스럽게 벌리려는 내가 소름 끼쳤다. 마침내 등딱지와 몸통이 벌어질 때, 마지막으로 집게발이 쫘악... 펴졌다... 

4단계. 몸통 양쪽에 붙어있는 아가미를 바짝 잘라주세요.

마지막 숨통을 조이는 것 같았다. 주인공의 산소호흡기를 거칠게 떼내는 드라마 속 악역 같은 나...

5단계. 몸통을 반으로 자르고 양념에 버무려주세요.

마지막이다.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마지막, 꽃게의 생전모습을 보는 것도 마지막...

수백 번의 사과를 하는 입과 수십 번의 가위질을 하는 손을 가진 '나'는 꽃게의 해피엔딩을 지켜주지 못했다. 꽃게는 처절하게 찢기고 잘려나가는 최악의 엔딩을 맞이했다. 


몇 년 전, 우연히 안도현의 시 <스며드는 것>을 처음 봤을 때 얼마나 울었던가... 무심코 담가 먹던 간장게장의 주인공에게 그런 슬픈 사연이 있을 수 있음에 같은 어미로서 얼마나 죄책감을 느꼈던가... 

스며드는 것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 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나는 꽃게에게, 간장이 천천히 스며드는 동안 놀란 아이들을 진정시킬 잠깐의 짬도 주지 않았다. 싱싱할 때 얼른 해치우려고 순식간에 사지를 절단했다. 어떤 아량도 베풀지 않았다. 우리 가족의 혼란스러웠던 하루가 행복하게 마무리된 것에 감사할 뿐이었다. 꽃게의 마지막 절규가 그려진다...

"넌 오늘 해피엔딩이라 좋겠다. 잘 먹고 잘살아라." 


    


이전 26화 아귀찜 그까짓 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