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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Sep 09. 2020

아귀찜 그까짓 거...

초밥, 회, 치킨, 족발, 숯불갈비...

또 뭐가 있더라?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당장 먹고 싶은 음식 리스트가 아니다. (물론, 모두 먹고 싶기는 하다...)

전문점을 이용해야 먹을 수 있는 메뉴다. 집에서 만들기 겁나고, 만든다고 해도 사 먹는 것만큼의 맛을 보장하지 못할 것 같고, '앓느니 죽지'라거나 '사 먹는 게 싸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음식들.


아귀찜도 내겐 그런 음식이다. 간혹 먹고 싶을 땐 주변에 소문난 맛집을 검색하지 아귀를 사서 해먹을 생각은 도통 해보지 못했다. 차 타고 10분만 가면 사람들이 줄 서서 먹는 아귀찜집이 있고 아귀보다 콩나물과 미나리가 더 많아 숨은 아귀 찾기나 눈치게임을 해야 하지만 남은 양념국물에 밥까지 볶아 먹고 나올 때는 충분히 배가 불렀고 잘 먹었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내가 아귀찜을 먹은 건지 미더덕찜을 먹은 건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두어 달 전, 순천에 다녀온 지인이 아귀와 꽃게를 사다 주셨다. 처가인 순천을 다녀올 때마다 흔히 볼 수 없는 실한 꼬막을 사다 주던 분이었는데 처음으로 꼬막 아닌 것을 주셨다. 꽃게는 쪄먹어도 되고 된장 풀어 구수하게 끓여내도 되니 걱정이 안 됐다. 그런데 아귀는... 딱 봐도 깔끔하게 손질된 게 분명했지만, 일단은 냉동실에 넣어놓았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몰랐다. 아귀는 어떤 아이인지, 어떻게 요리해야 하는지... 그렇게 냉동실 한구석을 차지한 게 두어 달. 이제는 처리해야 했다.


손을 보기로 한 날은 월요일로 정했다. 마침 아파트에 장이 서는 날이니 필요한 부재료들을 공수하기에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아 계획적으로 정한 날이었다. 인터넷에 '아귀찜 만들기'를 검색하니 끝도 없는 레시피가 등장했다.

'아귀찜 황금 레시피, 쉽고 맛있는 아귀찜 만들기, 전문점 부럽지 않은 아귀찜 집에서 만들고 특급칭찬받기...'

레시피에 나온 재료들을 점검했다.

미나리와 콩나물, 오만둥이를 샀다. 미더덕을 넣고 싶었지만 귀한 몸이 되셔서 구하기 쉽지 않았다.  콩나물의 대가리와 꼬리를 잘라 다듬었다. 야채를 씻어 손질해두고 양념장을 만들었다. 끓는 물에 소주를 붓고 아귀를 한번 삶아냈다. 콩나물을 한번 데쳤다. 전분물도 만들어놨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남편의 귀가에 맞추어 큰 웍에 순서대로 넣어 버무렸다. 모든 재료가 버무려지고 알맞게 익었을 때 전분물을 한 바퀴 넣어주고 다시 한번 위아래 버무려 주면 끝! 그럴듯한 그릇으로 옮겨 닮았다. 아귀찜 집에서 곁들여 나오던 마카로니 샐러드 대신 햇사과를 마요네즈에 버무려 준비했다. 보기에도 그럴듯하고 구색도 맞춘 아귀찜이 완성됐다.


주방을 둘러보았다. 전쟁통이 따로 없다. 각종 야채를 담아두었던 크고 작은 소쿠리, 대파 양파를 자르던 도마와 식칼, 아구와 오만둥이를 담아두었던 또 다른 소쿠리, 버무릴 때 사방으로 튀고 가스레인지에 흘러내린 뻘건 찜 국물,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마요네즈병... 눈을 질끈 감고 식탁에 앉았다. 일단 먹고 보자.

처음 만든 아귀찜 치고는 먹을만했다. 고추냉이 간장소스에 찍어먹는 맛이지 뭐 별거 있나. 하지만 뭔가 부족한 맛, 2% 부족한 그 무엇이 있다. 남편은 그게 조미료 맛이라고 위로(?)하며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싹싹 먹어치워 줬다.


사 먹는 것과 다르게 두툼하고 실한 아귀를 눈치 보지 않고 실컷 먹을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처음 만들어보니 손에 익지 않아 주방이 두서없이 어질러졌지만 몇 번 해보면 재료 준비부터 맛 내기까지 별거 아닌 요리가 될 것이다. 주저하고 외면하며 냉동실에 방치해두었던 아귀 대신 시장에서 갓 사온 싱싱한 놈으로 요리할 것이며 누가 아귀를 사다 준다고 하면 마지못해 감사하다고 하지 않고 격하게 반길 것이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장기화되는 코로나로 우울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거리두기, 고립, 일상의 파괴가 주는 부작용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한 정신과 교수는 코로나 이후 지연된 자살이 닥쳐올 수도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나만 힘든 게 아니다,  바이러스로 모두가 힘든 상황이니 견뎌보자'라는 생각 때문에 올해 자살률은 감소했단다. 하지만 상황이 종료되고 다시 안정적인 생활로 돌아가게 되면 심리적 방역을 하지 못한 이들이 한꺼번에 무너질 거라고 했다.

어디까지나 예측이길 바란다. '남들도 나처럼 힘든 게 아니었구나, 예나 지금이나 나만 힘들구나'라는 생각으로 무너지지 않기를 바란다. 모두에게 이 상황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어려운 법이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인생은 모든 낯선 처음과의 조우이다. 태어난 것부터가 처음, 걸음마를 뗀 것도 학교를 간 것도 친구를 사귄 것도 사랑을 한 것도 아이를 낳은 것도 가족을 꾸리는 것도 직장에 다니는 것도, 심지어 죽는 것까지 모두 처음. 그래서 힘들다. 해본 적도 없는 것들, 책에서만 본 것들을 일상에서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하고 지친다.


"모든 건물은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야...
바람, 하중, 진동. 있을 수 있는 모든 외력을 계산하고 따져서
그거보다 세게 내력을 설계하는 거야.
인생도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있으면 버티는 거야."


요즘 다시 보기 정주행 중인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나오는 대사이다.

건물이라면 설계 단계에서부터 예측 가능한 모든 외력을 계산하겠지만 인생은 예측 불가능한 외력의 연속이다. 어떤 바람이 나를 때릴지, 얼마만큼의 강도로 날 흔들어대는지 절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내력을 준비해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무너져내려서야 되겠는가. 혹은, 늘 긴장하고 살아서야 되겠는가.  

건축물 내진 설계 시, 지진에 견딜 수 있는 '강도'만을 확보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지진에 의한 흔들림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연성'도 갖추어야 비로소 지진을 이길 수 있단다.


모든 낯선 것들을 우리는 어찌어찌 마주하며 살고 있다. 쎈척하며 맞서기도 하고 약한척하며 흔드는 대로 몸을 맡기기도 한다. 그러니 그깟 코로나쯤, 그깟 거리두기쯤, 그깟 마스크쯤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어차피 적응되고 견뎌내고 지나갈 일이다. 새로운 바이러스가 다시 몰려오면 처음보다는 덜 당황할 테고 다시 담담히 마스크를 쓰고 원격수업에 돌입하면서 여유롭고 세련되게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조금씩 강도도 세고 연성도 있는 '우리'가 되지 않겠는가...


누군가 던져준 아귀에 당황했지만 남들도 다하는 거 나는 못할쏘냐 아귀찜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언젠가는 생선 잡아 회를 뜰지도 모르고 돼지족을 사다가 갖은 한방재료를 넣고 족발을 만들어먹을지도 모르겠다.

낯설고 당황스럽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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