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살 고등학생이 약식 한다는 소리에 엉덩이춤을 추며 좋아하다니. 평소에는 엄근진(엄격, 근엄, 진지)인데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막내다. 어렸을 때는 우리 집의 재롱과 애교를 담당했고 엄마 껌딱지였건만 고등학교 입학 후부터는 진로에 대한 고민까지 더해져 대화가 조심스럽다.
살가운 성격과는 별도로 까칠한 구석도 있어 어려서부터 마음이 쓰인 아이이긴 하다. 부엌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밥을 하고 있노라면 지나가다 슬쩍 선풍기 방향을 내쪽으로 틀어주는 자상한 면도 있지만 자신의 고집을 꺾으려는 엄마에게 차갑게 돌변하기도 한다.
4,5살쯤 되었을 때, 어린이집 앞에서 하원하는 아이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입구에서 신발을 신으면서부터 엄마를 발견하고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아이를 향해 나도 양손을 흔들어주었다. 선생님 손을 잡고 나오며 복작복작 서있는 엄마들 중 나를 손으로 가리키며 아이는 큰소리로 외쳤다.
"와! 호재 엄마다!"
그때부터였다. 이 아이에게 더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이.
그냥 "엄마~"라고 나를 부르지 않고 형의 이름 뒤에 엄마를 붙여 날 불렀던 것이다. 아무 생각 없는 호명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소심한 나는 둘째 아이가 느꼈을지도 모를 소외감이 걱정되었다. 자신의 엄마이기보다는 형의 엄마로 생각되었을 나의 잘못된 행동이 무엇이었을지, 언제 어느 순간이었을지 고민했다.
그날부터 첫째와 둘째를 대하는 내 태도에 차등이 없도록 각별히 신경 썼다. 형에게서 물려받은 옷만 입고 자랐다는 소리를 할까 봐 새 옷, 새 신발을 많이 사주었다. 다행히 큰아이는 동생에게 물려줄 수 없을 정도로 옷과 신발을 험하게 소비했다. 두 아이가 원하는 메뉴가 다를 땐 최대한 맞춰서 준비해주었다. 늘 다르기 일쑤였다. 한 아이가 김치찌개를 원하면 다른 아이는 된장찌개를, 카레와 짜장, 후라이드와 양념치킨, 김치볶음밥과 새우볶음밥, 토마토소스 스파게티와 크림소스 스파게티. 재료가 없다거나 너무 무리한 요구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웬만하면 들어주었다. 두 아이의 방학 기간이 다를 때엔 따로 데리고 나가 엄마와 둘이서만 외식하는 시간도 마련했다. '넌 특별하단다.'를 몸소 보여주기 위한 노력이었다.
'형과 똑같이' 말고 '오로지 나만을 위해 엄마가 준비한 것'이라고 생각하게끔 만든 것 중 대표적인 것이 약식이었다. 엄마가 해준 것, 집밥이라면 아무거나 다 좋다며 무엇을 차려줘도 군말 없는 아이였지만 유독 약식은 일부러 해달라고 했다. 간혹 누군가 주문한 약식을 포장하고 있노라면 첫 번째 포장한 것은 자신을 달라며 기다리곤 했다. 돈 받고 파는 음식이니 고객용 떡을 먼저 챙기는 것이 당연했지만 '가장 예쁘게 포장한 것, 제일 먼저 포장한 것을 너에게 준다'는 것을 항상 주지시켰다. 누구보다도 너 먼저, 무엇보다도 널 위한 것 먼저 챙기는 엄마라는 걸 약식을 통해 알려준 셈이다.
아이도 안다. 엄마가 하는 약식이 얼마나 시간이 많이 들고 손이 많이 가는지 말이다.
깨끗이 씻은 찹쌀을 세 시간 동안 물에 불린다. 불린 찹쌀을 한 시간 동안 쪄내고 중간에 소금물을 살살 부어 간을 맞춘다. 찹쌀이 익는 동안 밤을 까서 6 등분하고 대추를 돌려 깎아 조각낸다. 젖은 면포에 잣을 깨끗이 닦는다. 달궈진 팬에서 설탕이 기름에 녹아 부글부글 끓을 때 전분물을 부어 걸쭉한 캐러멜 소스를 만든다. 여기에 간장, 설탕, 계핏가루, 꿀, 참기름을 넣어 섞는다. 잘 쪄진 찹쌀과 양념, 밤, 잣을 골고루 섞어 스텐볼에 담고 스텐볼 지름보다 큰 솥에 넣어 두 시간 동안 중탕을 한다. 30분마다 뒤적여 아래로 가라앉은 양념을 다시 잘 섞어준다. 마지막 30분을 남겨두었을 때 대추를 넣고 다시 섞어준다. 처음부터 대추를 넣어버리면 힘없이 풀어져 없어지기 때문에 떡 완성 30분 전에 넣는다. 맛은 우러나오되 붉은빛과 형태를 간직한 대추가 된다.
완성된 약식을 작은 틀에 담아 모양을 만들고 하나하나 떡 비닐로 포장한다.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고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 포장에 드는 수고와 쓰레기를 생각하면 그냥 먹으라 해도 되겠지만, 포장 스티커를 뜯으며 비닐에 쌓인 떡을 먹을 때 '난 특별하다'는 생각이 아이에게 덤으로 전해지지 않을까 기대했다. 쌀 불리기부터 포장까지 꼬박 여섯 시간이 걸리는 약식이지만 맛있다고 엄지척하며 야무지게 포장을 벗겨먹는 작은 아이를 보면, 약식 하나로 엄마의 관심을 독차지한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면, 까짓것 얼마든 해줄 수 있었다. 난 '호재 엄마'이기도 하지만 '호진이 엄마'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온라인 클래스를 듣던 아이가 까탈을 부렸다. 더 이상 '학교'라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었다. 올해 내내 사흘이 멀다 하고 발병하던 검정고시병이 다시 도졌다.
엄마가 주장하는 사회성이니 교우관계니 하는 것들도 학교를 갔을 때 이야기이지 지금으로서는 그마저도 구현할 수 없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내년에는 끝날 것 같으냐, 가지도 않는 학교에서 내주는 무의미한 수행평가에 쏟는 시간과 노력이 아깝다, 그 시간에 차라리 수능 공부에 집중한다면 효율적이지 않겠는가, 예전과 상황이 변했는데 학교는 반드시 다녀야 한다는 일방적이고 획일적인 논리가 이해되지 않는다.
이제는 아이의 마음에 응답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학교에 다니다 보면 유야무야 흐려질 줄 알았는데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낸 것을 보니 관심 가져달라는 치기 어린 투정은 아니었다. 우리 집 애들은 무엇하나 쉽게 쉽게 그냥 넘어가는 것이 없는 것 같다가도, 어느 집 어느 아이나 키우기 어렵기는 마찬가지겠거니 한다.
"골프와 자식농사는 내 맘대로 안된다."던 대기업 회장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자식을 내 마음대로 키우고 싶은 게 아니라, 자식이 하고 싶다는 대로 놔두어도 괜찮은 건지, 아이의 판단을 따라가는 것이 잘한 결정인지에 대한 확신이 안 서는 것이 문제다. 어른이랍시고 잔소리를 했다가 왜 하고 싶은 대로 놔두지 않았느냐고 원망을 사는 건 아닌지, 갈등을 지속하다가 관계만 틀어지는 건 아닌지, 묵묵히 기다리며 지켜봐 주다가 중요한 시기를 놓치는 건 아닌지, 왜 그때 잡아주지 않았냐고 또 다른 원망을 듣는 건 아닌지...
답이 떠오르지 않고 머리만 지끈거린다. 태풍이 온다더니 비바람은 몰아치고 코로나 때문에 나갈 수도 없다. 집안에 꽁꽁 갇힌 우리 둘 사이에 불편한 공기만 떠다닌다. 찹쌀을 불렸다. 밤을 까고 양념을 만들었다. 두 시간의 중탕 끝에 완성된 약식을 하나하나 포장했다. 자연스럽게 다가와 식탁 맞은편에 앉은 아이는 조심스레 포장을 벗겨 입에 넣고 오물거린다. 엄마가 해준 약식을 먹으며 오만가지 생각이 떠오르려나? 고등학교 중퇴를 하려는 자신의 주장을 시원하게 받아주지 못하는 엄마이지만 '그래도 넌 내게 특별해~'라는 엄마의 마음이 약식을 통해 전해졌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