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려나 습하다. 발바닥이 마룻바닥에 척척 달라붙는다. 부엌엔 들어가고 싶지도 않지만 새끼 입에 뭐라도 넣어줘야 하는 엄마의 숙명으로 가스불을 켠다. 한창, '남이 해준 음식'이 제일 맛있을 40대이지만 내가 나를 위해 하는 음식이 있다. '닭똥집 볶음'이 그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1992년. 닭똥집 사랑의 역사가 시작된 해이다.
고등학교 입학 후 반장도 하고 전교 등수를 꼽아야 할 정도로 성실히 공부했던 나였으나 사춘기 때문인지 원래 성격인지 모를 반항심이 싹트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품행이 방정하고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직책 이건만 그냥 방정맞고 특이하기로는 모범적인 반장이었다. 수원의 남고 한 학급과 우리 반 전원의 반팅을 주선하기도 했고 교우관계를 챙기느라 성적은 계속 하향곡선을 탔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윤리 선생님, 사회 선생님, 학원 오빠, 이웃 남학교 '그 아이'등 끊임없이 대상을 바꿔가며 짝사랑에 매진했고 엄마와 치열하게 싸우는 못된 딸의 전형을 보여주었던 시기였다.
방송반 친구와 방송실 부스에 몰래 숨어 레몬소주를 마시는 과감함, 독서실에서 새벽 2시까지 공부 대신 숙면을 취하는 방만함, 학창 시절은 추억이 다라며 축제, 가요제등의 온갖 행사에 참견하던 오지랖으로 점철된 역사다. 그중 단연 일등은, 야자 시작 전 저녁시간에 학교 담을 넘어 닭똥집을 사러 간 대범함이다.
밤 10시까지 일과가 이어지니 도시락은 늘 2개였다. 하지만 제때에 하나씩을 소비한 적은 기억에 없다. 2교시가 끝난 쉬는 시간에 하나, 점심시간에 하나를 풀고 나면 저녁은 매점에 가서 컵라면이나 빵으로 해결해야 했다. 그것들이 식상해질 무렵부터 일탈은 시작됐다. 학교 담장만 넘어가면 다양한 저녁거리들이 펼쳐지는 유혹.
교문 옆 경비실에는 '김일성'이라는 별명의 우락부락한 수위 아저씨가 있었다. 담임 선생님이 적어준 외출증도 한참을 들여다보며 꼼꼼히 검사한 후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혹시 모를 동공 지진까지 감별해낸 후에야 비로소 교문을 열어주셨다. 그런 불편한 절차를 피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웃 중학교와 함께 쓰는 낮은 담벼락을 뜻을 함께한 동지들과 넘었다.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가뿐하게 넘은 뒤 쇼생크 탈출이라도 한 것처럼 기쁨에 겨워하며 한달음에 떡볶이 집으로 향했다. 떡볶이집도 식상해지자 탈출 반경이 점차 넓어졌다. 왕복 1시간 안에 해결할 수 있는 곳 중에 가장 다양한 먹거리가 준비되어있는 곳. 수원 남문이었다.
남문에 가면 먼저 '웬디스'라는 패스트푸드점에서 밀크셰이크를 먹었다. 톰 크루즈를 닮은 점장님을 보러 가는 친구들도 많았다. 작은 키와 숱이 없는 머리쯤은 옥에 티로 치부될 수 있을 정도의 외모. 지금은 어디서 뭐하시려나. 밀크셰이크를 사들고 찾아가는 다음 코스가 닭똥집 튀김집이었다. 지붕이 없으니 '집'이라고 하기엔 민망하다. 버스정류장 앞에 즐비하던 리어카들의 메뉴는 거의 비슷했다. 떡볶이, 순대, 핫도그, 닭똥집 튀김.
친구들에게서 주문받은 메뉴들을 사들고 서둘러 학교로 복귀했다. 왔던 길대로 담을 넘어 '유주얼 서스펙트'의 마지막 장면처럼 교정의 학생들 틈에 유유히 스며들면 임무 완료.
오고 가느라 시간을 다 써버렸으니 먹는 건 야자시간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책상 서랍에 몰래 숨겨두고 이쑤시개로 하나씩 찍어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24시간 학교를 돌아다니며 학생들을 감시한다고 해서 '이사도라'라는 별명이 붙은 교감선생님의 눈도 피해야 했고 가끔씩 불쑥 뒷문을 여는 담임선생님도 신경 써야 했다. 그렇게 험난한 상황에서 먹어야 꿀맛이지. 암. 그렇고말고.
남문 리어카에서 팔던 닭똥집은 튀김옷 없이 똥집만을 잘게 잘라 바짝 튀기고 소금을 무심하게 뿌린 것이었다. 쫄깃하면서도 서걱거리는 특유의 식감과 짭조름한 맛의 조화는 중독성이 강했다. 저렴한 가격에 양도 푸짐해서 2천 원어치만 사도 여럿이 배불리 먹었다. 닭똥집을 먹었던 횟수만큼 등수는 내려갔지만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담을 넘을 것 같은 맛이다.
그 시절의 일탈은 등수 하락의 형벌만 내린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최근 알았다. 나와 똑같은 '아들'을 보내주신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된 아이는 틈날 때마다 하나하나 자신의 일탈을 끄집어내 얘기한다. 워낙 친구를 좋아하고 공부보다 노는데 관심이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며 3년 동안 두어 번 술에 취한듯한 낌새를 차리기는 했었다. 간혹 길에서 담배 피우는 우리 아이를 봤다는 제보가 들어와서 자초지종을 따지면 여유롭게 웃으며 이렇게 말하던 아들이다.
"내가 바보야? 길에서 보란 듯이 담배 피우게? 안 펴요~ 걱정 마쇼~"
그 아이를 90프로 정도 믿었더랬다. 나머지 10프로는 내가 내 아이를 다 안다고 자만하는 엄마가 아니라는 나에 대한 믿음이었지 우리 아이가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의 10프로는 아니었던 것 같다.
밥을 먹다가, 함께 맥주잔을 기울이다가 아들이 툭툭 던지는 과거 행적은 기가 막힐 지경이다.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담배 폈지. 돈 아까워서 내가 사지는 않았으니 걱정 마. 얻어 피웠어."
"술을 그렇게 들키게 먹으면 하수지. 난 주로 산에서 마셨어. 어스름한 산은 사람도 없지만 먹다 남은 술을 감추기에도 좋거든."
"일 년에 한 360일은 마셨을걸?"
"솔직히, 독서실에서 공부한 적은 없어."
"다 추억이지. 고등학교는 추억 쌓으려고 다니는 거지."
동네 해장국집이라는 해장국집은 다 꿰고 있길래 해장국을 참 좋아하는 아이구나 했는데, 실은 술을 오지게 좋아하던 아이였던 것이다.
등판을 때릴 수도, 욕을 한 바가지 해줄 수도 없는 사람이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이 추억과 낭만으로 가득하다고 소개하는 나란 사람이 어떻게 그 아이를 욕할 수 있겠는가. 나 때문에 속 썩으면서도 모른 척하셨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저 그 시절을 기억하며 닭똥집을 볶아 맥주를 들이켤 뿐이다. 또 다른 일탈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고 뒷목 잡고 쓰러질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사회에 물의 일으키지 않고 가정을 꾸리며 성실히 살고 있으며 밥벌이는 못하고 있지만 애들 밥은 잘해 먹이는 엄마가 되었다. 그렇게 어기던 규칙과 원칙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며 도덕적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 아들도 그럴 것이다. 추억과 낭만이 가득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으니 세상은 재미있고 살만한 곳이라는 힘을 갖고 살아갈 것이다. 자신의 일탈에 관대했던 세상을 떠올리며 자신도 그러한 어른이 되야겠노라 생각할 것이다. 그 시절을 기억하며 닭똥집을 떠올리는 엄마를 닮아, 일탈 후 들이키던 해장국을 그리며 말이다.
닭똥집을 깨끗이 씻어 물기를 빼고 넉넉히 부은 기름에 튀긴다. 닭똥집이 익어 갈 때쯤 파와 마늘을 넣어 잡내를 잡아준다. 채에 받쳐 기름을 뺀 후 다시 프라이팬에서 볶아낸다. 청양고추와 소금 후추를 넣어 마무리한다. 예전엔, 한번 데치고 볶아주는 방법으로 만들었는데 얼마 전 검색해보니 백종원식 닭똥집볶음법이 있어 따라해 봤다. 잡내 없이 바삭한 볶음이 됐다.
우리집에서 가장 좋은 그릇, 손님이 오셨을 때 갈비찜 같은 가장 공들인 요리를 담던 그릇을 꺼냈다. 멋스러운 그 그릇에 닭똥집을 담으니, 귀한 요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