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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Jul 29. 2020

무엇이든 물리쳐주는 김치

"그 얘기 들었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김치 먹어서 코로나 19에 잘 안 걸리는 거랜다~~? 진짜래~"

양가 어머니들이 똑같이 말씀하시는 걸 보면 이미 어르신들 사이에선 과학적 근거고 뭐고 이미 정해진 '사실'이다.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이다. 사스 때도 메르스 때도 같은 소문이 돌았다. 마늘과 고춧가루가 들어갔고 발효까지 된 김치 덕분에 바이러스가 우리나라에서는 맥을 못 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 이쯤 되면 과학자들도 연구에 돌입해야 한다. 한국인중 김치를 먹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김치 섭취와 코로나 19 발병률, 완치율의 상관관계에 관한 연구> 뭐 이런 이름으로...


어려서부터 김치 간 보기는 내 몫이었다. 엄마 김치는 늘 맛있었지만 마지막 단계에서는 꼭 날 부르셨다.

"유정아~~ 이리 와서 김치 간 좀 봐봐. 뭐가 더 들어가야 하는지."

엄마가 제일 연하고 맛있는 부위를 입에 묻지 않게 돌돌 말아 입에 쏙 넣어주면 난 아주 진지하게 맛을 음미했다. 그러고 나서 한마디 한다. "맛있는데?" 그러면 엄마는 "간은? 짠 건 어때? 소금 쪼끔만 더 칠까?" 하며 마지막으로 소금 한 꼬집을 넣어 비비고 마무리를 했다. 그렇게 어려서부터 김치 만드는 광경과  간 보는데 익숙해진 나는 결혼 후 줄곧 김치를 담근다. 김치를 사 먹는 집도 늘고 있다지만 나는 그게 참 안됐다. 사 먹는 김치는 사서 바로 먹을 땐 맛있지만 오래 묵히면 이상한 냄새와 맛이 나는 것 같았다. 찌개를 끓여도 깊은 맛이 안 나고 무엇보다 쉰 김치를 물에 씻어 들기름에 무쳐먹는 것과 시판 김치는 안 어울렸다. 급기야, 묵은 김치가 한두 통 정도는 있어야 맘이 놓이고 새로 담근 싱싱한 김치도 갖추어 놓아야 하는 강박증에 시달린다.


얼마 전 보쌈을 준비하는데 작은 아이가 물었다.

"김치는? 어떤 김치랑 먹어? 겉절이가 있어?"

냉장고 속에 아직도 남아있는 김장김치랑 대충 주려던 내 손이 부끄러워졌다. 나처럼 어려서부터 김치 기미상궁을 해온 터라 김치를 잘 먹는 아들들이 대견하고 이쁘지만 없는 김치를 찾을 때면 솔직히 얄밉기도 하다. 냉정하게 무시하면 될 것을 구시렁거리면서도 구색 맞춰 준비하는 나도 참 극성맞다. 김치 맛 좀 아는 아들에 극성맞은 엄마다.


가족들의 입맛에 맞춰 식탁을 풍성하게 하는 것 외에도 김치는 여러 역할을 한다.

먼저, 고민을 해결해준다.

김치가 '오늘 저녁 반찬 뭐하지?'같은 고민도 단번에 해결해줄 치트키인 것은 맞지만 그런 고민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살면서 생기는 여러 심난한 일들, 정리되지 않는 머릿속을 비우는 데는 김치 담그기만 한 게 없다. 재료를 장만하고 손질해서 본격적으로 담그는 과정은 복잡해 보이지만 의외로 단조롭다. 자주 담그지 않으면 엄두가 안 날 일이지만 알고 보면 크게 신경 쓸 일 없고 멍 때리기에 좋은 시간이 된다. 잔뜩 쌓아놓은 쪽파를 다듬는 시간, 마늘을 까는 시간은 예능 프로그램 하나 틀어놓고 맘껏 웃기 좋은 시간이다. 김치를 절이고 버무리는 단순한 작업을 하며 오로지 '김치맛'만 생각하는 시간에 잠시 빠질 수 있다. 복잡해서 미칠 것 같던 뇌에게 휴식을 선물하다 보면 복잡하던 일들이 단순하게 여겨지고 의외의 간단한 해법이 떠오르기도 한다.


김치 담그기는 어색함을 물리쳐준다.

별것도 아닌 일로 불편해진 남편, 엄마의 잔소리로 방문 닫아버린 아들 때문에 집안 공기가 어색할 때 김치를 담근다. 현관문을 들어서며 코끝에 진동하는 진한 김치 양념 냄새를 그냥 지나치기는 쉽지 않다. 방문을 걸어 잠갔어도 목이 마르다는 핑계로 부엌을 쓰윽 염탐하러 나올 수밖에 없다. 김치 속을 버무리는 내 옆에 우두커니 서서 침을 꼴깍 삼키고 애타는 눈망울을 한 이들을 한번 째려보고는 노랗고 여린 속잎을 하나 떼어내 김치 속을 얹어 입에 넣어주면 엄지 척 한방을 날리며 또 입을 내민다. 그러다 보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골들을 냈는지는 잊고 노글노글해진 마음만 남는다.


김치 담그기는 고독마저도 물리쳐준다.

모두 바쁘니 나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뻔하고 별거 없는 집안일 대신 김치 담그기를 하다 보면 혼자 있어도 여러 명이 김장 담그듯 분주해지고 에너지가 생긴다. 언제부터인가 점점 혼잣말이 늘어난 탓에 문밖에서 누군가 몰래 엿듣는다면 필시 서너 명은 모여 김치를 담그나 보다 할 것 같다.

"가만히 있어보자~~~ 고춧가루가 어디 있더라~~?"

"여기 있잖아~~ 꼭 이런다니까? 코앞에 두고도 못 찾아요~"

"으이구으이구 넌 왜 자꾸 이렇게 흘리냐~~? 그렇게 조심 좀 하면서 일하래도 참 말을 안 들어요."

"어머어머어머. 이번 김치 왜 이렇게 맛있어? 또 먹어 또 먹어. 맛있을 때 먹어야 돼."


물론 지친 나를 달래주고 외로움을 극복하는 데는 다른 방법들도 많다. 책을 읽거나 따스한 볕을 쏘며 걷는 것, 지인들과 수다 떨며 고스톱을 치는 것, 풍경 좋은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거나 유명한 식당에서 남이 해준 밥을 먹는 것. 가족들과 여행을 가거나 맛집을 찾아다니며 추억을 쌓는 것.

이런저런 시도를 다 해보아도 밑바닥에서 올라올 줄 모르는 처진 감정을 끌어올려주는 데는 뭐니 뭐니 해도 부엌에서 사브작사브작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특효였다. 특히, 장아찌나 절임음식보다 소비도 잘되고 반응도 즉각적이며 매매일 인정도 받게 되는 김치는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고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전해다. 비어 가는 김치통을 보노라면 묘한 쾌감까지도 올라왔다. 온 삭신이 쑤신다면서도 가족들 먹인다며 바퀴 달린 장바구니를 끌고 시장으로 가서는 열무며 오이를 사 와 한통의 김치라도 담가야 맘이 편하다는 어머니들. 그들처럼 나도 김치를 담그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가족들을 챙기며 삶을 풍요롭게 하는 중이다.

김치가 아니어도 난 멋진 사람이고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날이 오면 '사서 먹는 게 싸다'라며 과감히 손절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김치 만들기가 내게 들러붙은 온갖 바이러스를 떼어주는 백신이자 치료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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