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봄유정 Aug 26. 2020

낙지면 어떻고 쭈구미면 어떠하리...

새색시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아니 며칠 전부터 종종거렸다. 어떤 음식을 준비할까, 그릇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모자란 수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떤 옷을 입어야 하나. 이만저만 고민이 아니었다.

결혼 후 처음으로 시댁 식구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자리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시어머님과 시이모님들, 큰누이 식구와 아주버님, 형님, 어느 누구 하나 편할 수 없었다. 드라마에서 봐오던, 새로 들어온 며느리 하나 잡겠다고 벼르고 있거나 까탈스러운 분들도 아니었고 막내아들 내외한테 뭐 얻어먹을 거 없나 기웃거리는 분들도 아니었다. 그저 시집식구라면 으레 어렵고 눈치 보이던 새댁이었고 첫 집들이에서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밥물 맞추는 것도 힘들던 새색시에게 친정엄마와 동생은 구원투수를 자처했다. 친정엄마 역시 24살 어린 나이에 시집간 딸이 시댁 입장에서 행여 부족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였을게다. 아무것도 모르는 딸을 대신해 메뉴를 고민하고 장을 봤다. 부족한 그릇이며 수저 등을 집에서부터 바리바리 싸왔다. 며칠 전부터 김치를 담그고 갈비를 사서 핏물을 빼 양념을 해두었다. 전날에는 밑반찬과 나물 몇 가지를 해놓았고 당일에 즉석에서 조리할 음식재료도 미리 손질해 준비했다.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며 뒤척이다 새벽 일찍 일어나 을 안치고 국을 끓였다. 상이 차려지면서 바로 만들어 뜨끈하게 내놓을 음식이었던 닭봉 강정과 낙지볶음만을 남겨두었다.


시댁 가족들이 약속된 시간에 오고 자리에 앉으면서부터 친정엄마와 새색시의 내밀한 갈등은 시작됐다. 연애시절부터 시댁에 드나들며 자연스레 알게 된 시댁의 식사 풍경은 친정의 그것과 달랐다. 친정집에서는 명절이나 제삿날 온 가족이 모일 때 코스처럼 하나둘씩 음식을 내놓으며 두세 시간씩 엉덩이 깔고 앉아 먹고 마셨더랬다. 시댁은 달랐다. 상을 펴는 순간 준비한 모든 음식이 한꺼번에 오르고 순식간에 식사를 하고 나면 그걸로 끝이었다. 과일과 떡 등의 간단한 후식까지 먹고나도 한 시간이 채 안 걸렸다. 이런 상황을 아는 새색시는 친정엄마의 고집스러운 상차림 습관에 시비를 걸었다. 음식은 자고로 온도가 생명이니 그때그때 후딱 만들어 따뜻하게 내놓아야 한다는 친정엄마와, 조금 식더라도 미리 준비해서 한꺼번에 상에 내놓아야 한다는 새색시. 결국 친정엄마가 속도를 내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조리를 서둘렀지만 이미 둘 다 기분은 상해버렸다.


밑간 한 닭봉을 튀겨 부르르 한번 끓여낸 양념에 버무리고 땅콩 분태를 뿌강정이 상에 올랐다. 이미 식사를 시작시댁 식구들은 중간에 올라온 강정을 맛있게 드셨다. 아무 문제없었다. 친정엄마는 서둘러 낙지볶음을 준비했다. 오래 걸릴 것 없이 센 불에 빠르게 볶아내면 그만인 음식이었다. 양념한 낙지를 먼저 볶다가 미나리와 각종 야채를 넣어 볶아 내면 되니 말이다. 낙지와 야채에서 빠져나온 수분덕분에 밥 비벼 먹으면 좋은 낙지볶음에 만족스러워하며 오목한 접시에 담던 그때, 새색시가 정색하며 한 소리했다.

"이게 무슨 낙지볶음이야! 낙지전골이지."

친정엄마 역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이게 낙지볶음이 아니면 뭐야? 뭐 다른 방식이 있어?"

"우리 시댁은 이런 낙지볶음 안 좋아해. 야채도, 국물도 없이 낙지만 빨갛게 볶아내는 그런 걸 해 드신단 말이야!"

딸의 타박이 어이없고 서운했지만 친정엄마는 꾹 참았다. 큰소리 내며 싸울 자리도 아니었다.

"이미 한걸 어떻게 해. 다시 좀 졸여볼까?"

"됐어! 벌써 식사 다 끝나가시는데 뭘 더해. 그냥 드려야지 뭐!"


예상대로 식사는 끝나가고 있었지만 시댁 식구들은 새로이 나온 낙지볶음 역시 맛있게 드셨다. 첫 식사대접은 무탈하게 잘 끝났지만 친정엄마와 새색시 사이엔 묘한 긴장감과 어색함이 남았다. 몇 날 며칠을 고생한 친정엄마와 여동생은 바쁜 일이라도 있는 양 서둘러 떠났고 긴장이 풀린 새색시는 잠이 들어 그들이 가는 것도 살피지 못했다.


인터넷 몰에서 유명하다는 양념쭈꾸미를 주문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양념된 고기나 해산물은 쳐다도 안 봤던 나다. 중국산인지 어디 것인지도 모를 재료와 조미료 범벅인 식자재는 불량식품으로 알았다. 손이 많이 가더라도 원물을 사고 집에서 만든 양념을 가미해 식사를 차렸다. 돼지고기를 사서 고기 망치로 두드리고 밑간을 해서 밀가루, 계란물, 빵가루를 묻혀 돈가스를 튀겼다. 다진 고기를 사서 각종 다진 야채와 섞어 손으로 수십 번 치고 모양을 잡아 햄버거 스테이크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 먹여야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줄 거라는 고집을 부렸다.

아이들이 자라 엄마 밥보다 바깥 밥을 더 자주 먹는 나이가 되고 보니 나도 슬슬 꾀가 나기 시작했다. 처음 한 번이 어렵지 한번 물꼬를 트고 나니 세상 편했다. 튀겨 나와 에어프라이어에 잠깐 돌리기만 해도 맛 좋은 돈가스부터 어쩜 그리 입에 딱 맞게 매콤 달콤한 양념을 입혔는지 모를 낙지볶음까지... 세상 편하게 살자는 친구의 말처럼 뭘 그리 안달복달하며 살았나 싶다.


포장된 쭈꾸미를 뜯었다. 뻘건 양념에 버무려진 통통한 쭈꾸미. 쓰레기통에 버렸던 포장비닐을 주워 들여다봤다.

쭈꾸미 (베트남산, 태국산)

국산이 아니면 먹지도 않던 시절이 있다. 양념으로 쓰인 고춧가루마저 국산인걸 확인하고 구매했더랬다. 이제는 괘념치 않는다. 반조리식품을 고른 사람이 더 이상 따지면 진상이다. 20년 전 나처럼.


요리도 못하는 주제에 엄마와 동생까지 불러놓고, 몇 날 며칠을 사돈댁 식사 챙기느라 밤잠도 제대로 못 자던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도 전하지 못하고, '우리 시댁은, 우리 시댁은'해가며 시댁 입맛 맞추느라 혈안이 되어서, 이렇게 해라 그렇게 하지 마라 갖은 타박을 다했던... 진상 중에 상진상이었다.

국물 없이 뻘겋게 볶아낸 낙지볶음이면 어떻고, 야채 잔뜩의 국물 많은 것이면 어떠한가. 낙지 대신 쭈꾸미나 오징어였던들 무슨 상관이었을까. 정작 내가 신경써야했던것은 시댁식구들의 입맛이 아니라 친정엄마와 동생의 수고와 마음이었음을, 조미료 범벅인 쭈꾸미를 볶으며 깨닫는 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철없던 새색시 시절을 소환해낸 매운 쭈꾸미볶음을 밥에 쓱쓱 비벼 먹으며 콧물인지 눈물인지를 함빡 쏟아내 본다.



이전 23화 응답하라 닭똥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