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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Sep 29. 2020

어머님 갈비찜은 어떻게 그렇게 맛있어요?

명절이 코앞이다. 코로나로 귀향, 귀성을 자제하라는 당국의 권고가 있다.

"조상님은 어차피 비대면. 코로나 걸리면 조상님 대면"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돌아가셨다더라"

"불효자는 옵니다."

기발하고 강렬한 문구들이 여기저기서 날아온다. 30분 거리에 시댁과 친정이 있는 내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다. 코로나 핑계를 대기에는 거리도 가깝고 모이는 인원도 적다. 가족끼리 평소대로 밥이나 한 끼 하는 게 다여서 집에 있겠다고 할 명분이 없다. 덕분에 어머님표 갈비찜을 먹을 수 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어머님의 갈비찜.

가족들 모두 엄지척 하는 음식이지만 내가 그 맛을 인정하며 입 밖으로 표현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흔하디 흔한, 눈에 보이지 않는 묘한 신경전을 나도 겪었다고 회상한다. 어머님은 어떠셨을지 모르겠지만.


기억은 결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 남편집에 가끔 놀러 가곤 했다. 어머님과 어느 정도의 친분을 쌓았다고 생각한 나는 어느 날 전화를 드렸다. 여행을 가신 엄마 대신 밥상을 차려야 하는데 냉장고에 있던 비듬나물을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 몰라 여쭤보려던 것이었다. 어머님은 대뜸 "너 바보 아니냐?"라며 큰소리로 웃으셨다. 그걸 어떻게 무치는지 왜 모르냐고 하시며 수화기 너머로 대충대충 설명해주셨다. 비듬나물 무치는 요령을 여쭤보려던 건 핑계였으니 어머님의 설명이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대신, '바보 아니냐'가 나를 무시해서 하신 말씀인지 친해지려고 하신 말씀인지를 고민했다. 아직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친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결혼 후에도 어머님은 편히 대하기 어려운 분이었다.

결혼하기 2년 전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남편과 사별한 후 어머님은 자발적 고립에 들어가셨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묘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산소를 돌보았다는 시묘살이의 마음을 품으셨던 것 같다. 집 밖으로 나오지도 않으시고 친구들도 만나지 않으셨다. 집으로 찾아와 벨을 누르는 친구들을 피하고 싶어 구석방에 들어가 이불을 들쑤고 귀를 막고 있었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가족들은 정신과 상담을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수십 년 다니시던 스포츠 센터를 그만두고 멀리 떨어진 낯선 동네의 스포츠 센터에 등록을 하셨다. 당신의 과거를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편하게 운동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남편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드셨던 만큼 남편 없는 여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도 받아들이기 싫으셨던, 자존심이 강한 분이셨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10년째 되던 해에 어머님의 칠순이 있었지만 잔치를 완강히 거부하셨다. 아쉬운 마음에 자식들이 저녁식사 장소에 차려드렸던 고희상을 치우라고 역정을 내시며 던지신 말씀은, "사람이 죽은 마당에 이게 다 뭐냐! 너희들 미쳤냐?"셨다. 유난스럽다고 느꼈다. 대체 돌아가신 아버님과 얼마나 정이 깊으셨으면 저럴까 안쓰럽다가도 좀 심하신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기일이나 명절에 내 담당이었던 전 외에도 떡과 김치, 반찬 몇 가지를 해가곤 했다. 알아주십사 해가는 건 아니었지만 아는 체 안 하시면 그게 또 그렇게 섭섭했다. 떡을 만들어가면 어느새 떡집에 가셔서 팩에 든 떡 몇 가지를 사 오셔서는 맛있으니 어서 먹어보라고 권하셨다. 제사를 마친 식구들이 모두 떠나면 그제야 뒷베란다에 내놓으셨던 내 떡을 발견하셨다. 내가 담가 갔던 김치는 상에 내지 않으셨다. 대신 가족들이 좋아한다는 종갓집 김치를 쓱쓱 썰어 차려내셨다. 늘 똑같은 제사상 음식을 대신할 해파리냉채 같은 음식을 해가도 내가 나서서 챙기지 않으면 상에 올라오지 못했다. 내가 만들어간 음식이라고 호들갑 떨며 내놓는 게 싫어 모른 척했던 적, 나 역시 잊어버린 척했던 때도 있었다. '내 귀한 막내아들을 뺏어간 요망한 년!'은 아니어도 살림이나 요리에 내공도 없는 며느리가 자꾸 뭘 해오는 게 못마땅하신가보다 했다. 남편에게도 어머님에게도 내색을 못하고 그냥 혼자 섭섭해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가슴에 꾹꾹 새겨놓기는 했었나 보다. 뒤끝이 참 길기도 하다.


명절 때마다 뉴스에서 명절증후군을 앓는 며느리 얘기가 나오면 "너도 스트레스받냐? 일이 뭐가 있냐? 맨날 먹는 식구들 밥 차리는 건데. 우리집 같이 일 없는 집이 어디 있나?"라며 질문도 답도 다 하셨다. 난 그저 맘 좋은 며느리마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한 달에 몇 백씩 용돈을 준다는 남의 집 며느리 얘기를 하시며 "너한테 부담 가지라고 하는 소리 아니다~"라고 하셔도 싫은 내색을 못했다. 그저 쿨한 며느리가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애교도 아양도 못 부리는 며느리였지만 동시에 반항도 짜증도 내지 않는 며느리였다. 겉으로는 사람 좋은 척 허허댔지만 아무도 모르게 뾰족한 마음을 갈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 뾰족한 마음을 소심하게 드러낸 게 갈비찜이었다. 온 식구들이 맛있다고 해도 못 들은 척했고 작은집 아가씨가 "큰어머니, 도대체 어떻게 하시길래 이렇게 부드럽고 맛있어요?" 하면 혼자 일어나 설거지하러 가버렸다. 세상에서 할머니 갈비찜이 제일 맛있다는 작은 녀석이 괜히 미웠고 금세 비운 갈비 그릇을 다시 채우러 들고 갈 때면 공연히 심술이 났다. 하지만 나 역시 밥상에서 제일 먼저 집어 들고 제일 많이 찾았던 건 갈비찜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런데, 어머님이 몇 년 전부터 변하셨다.

"난 애미밖에 의지하는 사람 없다."

"넌 못하는 게 대체 뭐냐?"

"제사상은 다 애미가 차렸네. 잘 차렸다."

늘 만날 때마다 칭찬 일색이셨다. 별 볼 일 없는 인생을 산다고 생각하는 내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만큼 무한한 신뢰를 보이셨다. 속상하고 화나는 일이 있으실 때면 내게 전화해 한바탕 풀어놓으셨고 팍팍한 살림에 보태라며 용돈도 보내주셨다. 20년 전 대쪽 같던 어머님 대신 연약하고 여린 여인네가 그 자리에 있었다.


어머님이 변하신 걸까 내가 변할 걸까. 어머님은 늘 그대로 셨는데 삐뚤어진 내 마음이 모든 번뇌의 시작 아니었을까. 고부갈등 없던 우리 둘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다며 괴로워한 건 왜였을까. 무엇이 맛있는 갈비찜을 맛있다고 말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걸까.


어머님에게 얼마 전부터 질문이라는 걸 다시 시작했다.

"어머니~~ 이건 어떻게 무치신 거예요? 전 이렇게 안되던데."

"지난번 어머님이 하신 세모가사리 볶음이 맛있어서 따라해봤는데, 전 왜 바삭하게 안되죠?"

"어머님 갈비찜은 어떻게 그렇게 맛있어요? 애들이 할머니 갈비찜이 제일 맛있대요. 제가 한건 별로래요."


어머님은 내게 바보 아니냐며 웃으시는 대신 반가운 손님 대하듯 신나서 설명해주셨다.

"그래? 애들이 그렇게 맛있대니? 나 간도 안 본 건데? 아이고. 내가 그 갈비를 사려고 지하철 타고 마장동까지 다녀왔다는 거 아니냐. 무거워서 혼났네. 거긴 명절 때 사지도 못해요. 미리 주문해놔야 겨우 살 수 있지. 난 습관이 못돼서 한우 아니면 사지를 못해. 양도 조금은 성에 안차지. 예전에 식구가 좀 많았냐?"

"그 갈비 사흘 전부터 기름 걷어내고 끓이고 또 식혀서 걷어내고 또 끓이고 한 거야. 한우라서 기름이 얼마나 나오는지... 하도 끓여서 흐물흐물해진 게 뭐가 그렇게 맛있다고 저렇게들 잘 먹는다니?"


여전히 난 어머님이 잘 나가는 며느리 얘기를 하셔도, 명절증후군 뉴스에 혀를 끌끌 차셔도 고개를 끄덕이고 잘 들어드린다. 하지만 '시늉'만 하는 경청은 아니다. 속으로 뾰로통해있거나 베베 꼬여있지도 않다. 내가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말대로, 크게 괘념치 않는다. 그러면, 상대도 아무렇지 않게 말한 게 되어버린다. 내가 참 날을 세우고 살아왔구나 싶다.


돌이켜보니, 어디서 언제 누굴 만나도 난 늘 그런 식이었다. 내 비위를 거스리는 상대를 만나면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대놓고 말은 못 했다. 교양 있는 어른의 탈을 쓰고 속으로는 베베 꼬여서 흉볼 구실을 만들기 바빴다. 상대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는 방식으로 나만을 위한 복수를 하고는 혼자 통쾌해했다. 순간의 통쾌함으로 가라앉았던 앙금이 뿌옇게 물로 흩어지며 옅어진다. 하지만 이내 감정의 앙금, 미워하는 마음은 다시 가라앉아 쌓이기 마련이다. 그러니, 상대를 미워했다는 자괴감에 힘들고 늘 원점인 미움 때문에 피폐해지는 건 내 몫이었다. '모든 게 내 탓'이라서 마음을 바꾸어야 하는 게 아니라 '누구의 탓도 아니라서' 바꾸어야 했다.


명절을 앞두고 날이 선 고부가 많을 테다. 나는 경험해보지 못한 무개념의 시어머니가 계실 수 있고, 드라마에서나 봤음직한 비상식적인 며느리가 있을 수 있다. 다름을 인정하고 내 마음을 바꾼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들에게 명절은 얼마나 지옥일까...

반면, 상대가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수준의 시어머니나 며느리가 아니라면, 우리 엄마나 딸에게서도 볼 수있는 일반적인 모습이라면, 조금은 관대해져 보기를... 뭐 하나든 걸리기를 기다렸다가 마음에 방을 하나 만들어놓고 매일 소설을 써 내려가면서 나 자신을 들들 볶지 말기를... 그 뭐 하나 때문에 가려진 상대의 장점을 묻어버리지 말기를... 내 마음이 바뀌자 다르게 보이는 상대와 세상을 꼭 경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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