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오늘 저녁 메뉴는 뭐야?"
입버릇처럼 묻는 친구가 있다. 세상에 고민은 그것 하나뿐이라는 듯 온통 반찬 걱정인 그녀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미친 듯이 집밥을 한다. 이유는 하나. 주말에 밥을 안 하기 위해서다. 주말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부엌에 들어가지 않고 끼니를 해결하고 싶단다. 그러면서, 사람은 굳이 세끼를 먹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한다. 이미 현대인은 너무 많은 음식을 섭취하고 있기 때문에 하루 이틀 정도는 두 끼만 먹으면서 속을 좀 비울 필요도 있다고... 나름 설득력이 있다.
반찬뿐 아니라 남편도 잘 요리하는 그녀는 아양, 애교, 협박, 핑계, 잔머리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주말에는 주방 문을 걸어 잠근다. 대신 월요일만 되면 다섯 시부터 가족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는 일곱 시까지 예닐곱 개는 되는 반찬들을 뚝딱 만들어 한상 거하게 차려낸다. 가족들은 다음 끼니로 이월되는 반찬 없이 싹싹 먹어치운다. 그게 또 그녀의 고민이다. 매 끼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 투덜대면서도 다음날 같은 시간이면 큰 키에 긴 앞치마를 메고 땀을 뻘뻘 흘리며 밥을 한다.
내가 아는 집밥은 그렇게 탄생한다. 집밥을 담당한 누군가의 반복되는 오랜 고민과 땀방울로. 그 고민의 끝은 결국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제외한 '누구'.
엄마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나 혼자 먹을 거면 아무거나 대충 먹어도 되는데..."
나 역시 혼자 먹는 밥을 위해 공들이는 법이 없다. 냉장고에 항시 있는 김치, 멸치 등의 반찬에 찬밥 한 덩이로 허기나 달래면 그만이다. 하지만 수저를 한벌 더 놓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머릿속으로 냉장실과 냉동실 지도를 그리고 문을 열어 실제 상태를 확인한다. 있는 재료로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의 조합과 가짓수를 구상한다. 상대의 기호도 고려한다. 제한된 시간 내에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는 순서와 동선, 상에 차려낼 음식의 온도까지 계산하면 드디어 작업 개시.
그렇게 '누군가'를 위한 한상은 만들어진다.
20년간 주부로 살면서 최소 하루 두 끼씩 차렸다고 치면 일주일에 14번, 1년이면 730번, 20년간 14,600번의 끼니를 차렸다. 외식하고 어쩌고 한 거 뺀다고 쳐도 만 번이 넘는 밥상을 차린 셈이다. 그래서 너무 지겨웠다. 맨날 같은 국, 같은 반찬도 지겨웠고 같은 시간 같은 고민을 하는 것도 지겨웠다. 나만 고민하는 것도 지겨웠고 나만 차리고 치우는 것도 지겨웠다. 그래도 그냥 했다. 나 먹자고 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엄마 밥 먹고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가는 자식들, 집밥 먹으며 반술 한잔 하는 그 시간을 행복해하는 남편 때문에 차렸다. 만 번의 루틴을 반복하다 보니 만개의 이야기보따리가 만들어졌다.
< 가장 보통의 집밥 >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지금까지 스물아홉 가지의 음식 이야기를 풀어냈다.
시루떡, 보쌈김치, 쑥개떡, 전, 육포, 고기, 참치, 급식, 게국지, 된장, 계란찜, 황기 삼계탕, 카레, 소시지 떡, 먹꼴뚜기, 김치, 닭똥집, 낙지볶음, 약식, 아귀찜, 꽃게, 미역국, 갈비찜 등 특정 음식과 관련된 이야기뿐 아니라 집밥 자체에 대한 이야기도 섞여있다. 그런데 다시 들여다보니 그 안에는 온통 '사람' 이야기뿐이었다. 음식 이야기라면서 그 흔한 레시피도 없다. '음식 = 사람'이라는 이상한 공식이 등장하는 음식 이야기.
'음식 끝에 정난다'라는 말처럼 함께 나눈 음식은 사람의 마음까지도 이어준다. 그렇게 나눈 마음은 두고두고 남아 같은 음식을 볼 때마다 자동으로 펼쳐진다.
'음식 끝에 맘 상한다'라는 말처럼 음식으로 받은 상처도 오래간다. 쪼잔해 보일까 봐 애써 의연한 척 하지만 두고두고 사람을 힘들게 한다.
정을 나눈 음식 이야기만 글로 남겨 아쉽다. 내 음식에, 나로 인해 맘 상했을 누군가에 대한 기억은 편리하게 도려낸 것 같아 찜찜하다. 그런 이야기까지 더해졌어야 더 보통의 집밥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도려낸 줄 알았던 기억이 어딘가 후미진 구석에 모여있다가 하나 둘 펼쳐진다면 그때는 또 다른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 최악의 집밥 > 뭐 이런 제목으로...
혼밥, 혼술이 대세인 시대에 가족과 사람을 소환하는 음식이 집밥의 정석인 것처럼 떠들어댄 것이 시대착오적일 수 있겠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위해 근사하게 차려낸 매 끼니가 소중한 집밥의 정석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 '세상에는 어머니 수만큼의 레시피가 존재한다'는 말 대신 세상에는 밥을 차리는 사람 수만큼의 집밥이 있다.
가장 개인적인 집밥이 가장 보통의 집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