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문서보다 더 소중한...

by 늘봄유정

아버님께서 생전에 들고 다니셨다는 서류가방.

몇 년 전, 어머님께서 버리려 하시는걸 냉큼 챙겨 왔다. 결혼 전 한 번밖에 뵙지 못했지만 남편의 아버지이자 아이들의 친할아버지를 기억하는 물건으로 갖고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런 순수한 마음에 더해 음흉한 속내도 있었다. 비밀번호가 뭔지 몰라 열어보지 못했다는 어머님의 말씀에, "혹시?"라는 괜한 기대감이 올라왔던 것이다.

"별거는 없을 거다~"라는 어머님의 말씀이 '대단한 게 숨어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뭐일지는 잘 모르겠구나.'로 해석이 되면서 반드시 열어봐야겠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당장 열어볼 것처럼 가져와놓고는 결국은 다락방에 올려놓고 잊고 지냈다. 그러다 청소를 하러 올라갔다가 발견하고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서류가방의 비밀번호를 캐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000. 툭. 실패

001. 툭. 실패

...... 099. 툭. 실패.

000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찾아보기로 하고 099까지 인내심 있게 다이얼을 돌리며 열어보기를 반복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사이, 학교에서 돌아온 작은 아들은 내려놓은 다락방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엄마의 기이한 행동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더니 이내 자리를 잡고 앉아 자신도 도전해보겠다고 했다. 엄마 같은 무식한 방법이 아니라 전문적인 방법을 쓰겠다던 녀석은 꽤나 많이 해본 것 같은 솜씨로 한쪽 눈을 실눈으로 만들어 다이얼 틈새를 살펴가며 만지작거렸다.

채 5분도 걸리지 않아 '찰카닥'소리와 함께 봉인돼있던 서류가방이 활짝 열렸다.

떨리던 순간이었다. 땅문서 내지 무기명 채권 같은 게 가득 들어있다면? 금궤라도? 해외출장을 다녀오시며 미처 환전하지 못한 달러가 잔뜩?


서류가방에서 나온 것은 아버님의 명함 여러 장이었다. 한문 명함 한 장과 영문 명함 예닐곱 장. 한껏 부푼 기대가 깨져 섭섭했던 나와 달리 작은 아들은 대단한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입이 떡 벌어졌다. 전설처럼 전해지던 할아버지의 화려한 과거가 새겨진 명함. 그것이 아이에게는 보물이었던 것이다.

"나 이거 하나 가져도 돼?"라고 묻더니 답도 기다리지 않고 냉큼 휴대폰 케이스를 열어 쏙 끼워 넣고 닫았다. 휴대폰 뒷면의 투명케이스 안쪽으로 'President O.O.LEE'라고 쓰여있는 명함이 훤히 보였다. 든든한 뒷배가 생긴 것처럼 흐뭇한 표정. '그래, 그거면 됐다!'라고 생각하며 가방을 접어 다시 다락방으로 올렸다. 내용물을 확인했으니 버려도 될테지만, 클래식한 브랜드 서류가방이니 중고시장에 팔아도 짭짤하겠지만, 역시 갖고 있어야 할 물건이다 싶었다. 명함 하나도 소중히 여기는데 하물며...


명함의 기운을 얻은 탓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작은 아이의 1학기 성적이 꽤 괜찮았다. 그래서 다락방 계단을 내려 다시 엉금엉금 올라갔다. 양쪽에 붙은 버튼을 눌러 가방을 열고 아직 남아있는 명함 중 두장을 꺼냈다. 12월에 수능을 보는 큰아들 녀석과, 열심히 사시던 아버지를 닮아 직장을 다니며 틈틈이 자격증 시험 준비를 하는 당신의 막내아들 휴대폰 뒷면에 꼭 끼워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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