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20주년이다. 코로나 핑계로 특별한 기념행사 없이 넘어갔다. 형편상 선물도 생략하기로 했다. 언젠가 모든 상황이 허락해 근사한 장소에서 밥을 먹거나 멋진 곳으로 여행을 가게 된다면 거기에 이름을 붙이면 된다는 것에 합의했다. 20여 년 전의 우리와 확연히 다른 온도차다.
며칠 전 업무차 포천을 다녀오는 길에 일동에 들러 '이동갈비'를 먹었다. 크게 변하지 않은 듯 낯익은 거리 풍경에 불현듯 남편과 이곳에 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귄 지 200일'을 기념하며 광릉수목원에 갔다가 저녁으로 갈비를 먹었더랬다. 황급히 영롱한 갈비의 자태를 사진에 담아 남편에게 보냈다.
"이동갈비 먹는 중 ㅋ. 200일 때 왔었는데..ㅋ"
"ㅎㅎ 그랬지... 한참 물고 빨게 해 줄 때... ㅠㅠ"
수목원으로 향하던 버스 안에서의 설렘, 아무도 없이 고즈넉한 수목원에서의 햇살,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나누던 입맞춤, 이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남편의 말처럼 서로에게 한없는 사랑을 허용하던 시절이었다. 아니, 갈구하던 시절이었다. 대체로 내쪽에서 더 그랬으며 사랑을 넘어선 '집착'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랬었었었었었었었었었다.
20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이제는 남편의 자유를 허용하고 나의 자유를 갈구한다. 내 심신의 평안함을 흐트러트리지 않기를 바라며 나 없이도 행복한 영역을 구축하기를 희망한다. 흔히 사랑이 식는다고 이야기들 하지만 난 사랑의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라 생각한다. '따로 또 같이'랄까? 물론 남편은 나의 이 패러다임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어쩌면 20년 전과 극명히 다른 내 사랑의 온도 차이에 적응하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집안 정리를 할 때마다 버릴지 말지를 한참 고민하다가 도로 넣어놓는 물건 중 일부가 결혼과 관련된 것이다. 당연히 해야 하는 줄 알고 했던 것들. 한복과 스튜디오 촬영 사진이 대표적이다. '스드메'라고 불리는 스튜디오 촬영, 드레스, 메이크업은 결혼식 준비 비용에서 상당한 비용을 차지한다. 다행히 지인 소개로 싸게 준비했지만 그땐 몰랐다. 세월이 지나면 이렇게 짐이 될 것이라고는...
나랑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주변 지인들 모두 청록색 치마에 다홍 저고리 조합으로 한복을 맞췄다고 한다. 거기에 시어머님은 두루마기까지 맞춰주셨다. 남편의 한복은 신부 측에서 하는 거라지만 시어머님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신부의 어머니는 신랑의 두루마기를 안 맞출 구실을 찾지 못했다. 없는 형편에도 평생 한 번뿐이니 아쉬움 없게... 한 번밖에 입지 않을 옷에 큰돈을 쓰셨다. 앞으로도 두루마기를 입을 일은 없어 보이는데도 버리지 못하는 이유다.
남들 하니까 했던 웨딩촬영... 3월 초에 결혼하느라 2월에 촬영을 했는데, 엄동설한 한파를 뚫고 아무도 없는 원천유원지에서 쓸쓸하게, 서둘러 촬영했다. 해야 하는 일이니 가능하면 빨리 해치우자는 심정으로... 스튜디오에 돌아와서 몇 장의 사진을 야외보다 더 빨리 해치우고는 함들이를 위해 부랴부랴 집으로 향했던 날이다. 신혼 집들이에 온 손님들에게 으레 보여주던 사진첩들은 거실에서 방으로, 방중에서도 더 후미진 방으로 옮겨지다가 10여 년 전부터는 다락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제는 결혼식 사진을 보자는 손님도 없지만 나조차도 열어보지 않는다. 지금보다 10kg이나 덜 나가고 20년이나 젊던 시절의 나와 남편을 보는 것은 은근히 흐뭇하지만 처량한 겨울을 숨기려고 과감하게 시도한 CG는 눈에 거슬린다. 게다가, '그때 그 비용을 아꼈다면 우린 좀 더 나은 삶을 살지 않았을까' 하는 후보군에 사진첩도 끼어있으니...
그럼에도 서로에게 자유보다는 구속을 허락하고 갈구하던 시절의 증거물을 쉽사리 버리지는 못한다.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박혀있어서라는 이유도 있지만,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의 두 남녀가 사진을 위해 가식적으로 잇몸을 드러낸 게 아니라 서로만 봐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기 때문임을 문득문득 기억해내기 위함이다.
뜨거운 여름밤은 갔고 남은 것들은 버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렸지만, 또다시 갈구할 우리의 사랑을 위해 남겨두어야겠다.
* 그나저나, 집집마다 결혼사진이 처치 곤란이란다.
"결혼사진 깔끔하게 처리해드립니다!"라는 문구로 사업하면 잘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