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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Nov 21. 2020

아흔한 번째 시시콜콜

<생활편>

젊은 남녀는 어쩔 줄 몰라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는 듯한 얼굴...


마을교사 홍보영상 제작 업체의 PD와 작가를 앞에 앉혀두고, 그들이 가져온 시나리오를 검토하는 자리였다. 이미 지난 회의 때 두 가지 시안을 확인한 후 1안으로 결정을 한 상태. 오늘은 확정된 1안의 대본을 보면서 인터뷰 질문은 적절한지, 다음 컷으로 넘어가는 장면이 자연스러운지 등만 확인하면 되는데,  의뢰인들은 도저히 진도를 못 빼고 있었다.


진도가 안 나가던 몇 가지 이유를 내 나름대로 정리해보자면,

첫째, 회의 참석자가 매번 바뀌었다.

정확히 말하면 꾸준히 회의에 참석하던 4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인원들은 들쑥날쑥했다. 그러다 보니 총 세번의 회의를 하면서 흐름을 알고 내용의 수정과정을 알고 있던 4명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은 의도도 맥락도 파악하지 못했다. 사정이 그러하니 지난 회의에서 끝났던 이야기를 다시 소환해내기 일쑤였다.

예를 들어, 지난 회의 때 인상적인 도입부로 만장일치 결정된 1번 시안에 대해 오늘 참석자는 '너무 파격적이다, 일반적이지 않다'라며 제동을 거는 식. 그런 제동도 내치지 못하고 다시 검토하고 설득하는 작업을 반복하다 보니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했다. PD님 입장에서는 '얘네들 뭐지? 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지?'라고 생각하셨을 듯하다.


둘째, 참석자가 많고 다양했다.

마을교사 홍보영상이니 운영진들은 당연히 참석하는 게 맞지만 인원이 많다 보니 한 사람이 한 마디씩만 거들어도 일곱여덟 마디... 게다가 한 가지 화두만 던져져도 이야기는 삼천포를 지나 제주도까지 찍고 올 참이었다.

물론 나름 진지한 고민들이었다. 다만,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시안에서는 멀어지고 있는 것...

장학사, 마을교사, 교육청 직원 등 다양한 관계자가 모이다 보니 영상속에 서로 구현하고 끼워 넣고 싶은 가치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기도 했다.

'우리 시가 20년 새에 70만 인구가 유입되었고 인적 자원이 풍부해졌다는 내용이 살짝 가미되었으면 좋겠다.'

'마을교사를 해보면 마을교사는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점을 느낄 수 있다는걸 강조했으면 좋겠다.'

'학교 선생님과 학생 인터뷰도 들어갔으면 좋겠다.'

.....


이야기가 한창 진행중일때, 내 옆자리에 앉아 계시던 PD님과 작가님이 나지막이 주고받는 대화가 들렸다.

"마지막 자막 뒤편에 지도를 넣으면서 사람이 유입되는 느낌의 그림들이 쏙쏙 나오게 하면 어떨까요?"

"그걸 나한테 얘기하지 말고 크게 얘기해~~ 속삭이지 말고~"

하하하...

다양한 의견을 쉼 없이 쏟아내는 의뢰인들 앞에서 점점 작아지고 갈곳 몰라 헤매는 두 어린양을 위해 나는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담당 주무관님도 정리되지 않는 머릿속을 투명하게 드러내 보이며 넋이 나가 계셨다. 이 상황을 정리할 사람은 나뿐이라는 오만함과, 디베이트 코치로서 양측을 조율해야 한다는 묘한 책임감을 느끼며...


"작가님~ 무엇이든 말씀 주셔요~ 저희가, 못 알아듣고 엉뚱한 소리를 할 수는 있지만 안 듣지는 않아요. 일단 말씀 주시면 다들 들으실 거예요~"


PD님과 작가님의 조심스러우면서도 소신 있는 의견을 들은 후 모두가 내린 결론은...

'원안대로 가기'


결론은 원점이었지만 두 시간의 난장이 무의미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 고정관념을 계속 지우고 수정하는 시간, 이야기가 제주도까지 가더라도 인내심 있게 기다리는 법을 훈련하는 시간, 양측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며 어느 지점에서 효율적으로 마무리를 할 것인지를 타진해보는 시간이었다.

무엇보다도, 소통이 시원하게 되려면 일단, 누구든 어떤 말이든 내지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시간이다. 상대가 못 알아들을 수도 있고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지만 말하지 않으면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다는 것. 소통의 시작은 끊임없는 '발화'라는 것.

벽에다 대고 얘기하는 기분이 들더라도 일단 말하면 어디선가 가서 닿지 않겠는가.


그런데 한편으로는, 아무도 경청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다. 나만의 사고에 사로잡혀 새겨듣지 않으면 말이다. 일방적인 전달만 존재하고 그에 대한 반응이 없다면 진정한 소통은 물 건너간 것 아닐까. 그러니 소통이 시작되려면 귀담아듣는 이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오늘의 Topic은...

<소통의 시작은 '말하기'이다. vs. 소통의 시작은 '듣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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