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도 사회생활이라...

by 늘봄유정

그날이 그날이었던 올해였고 어느 때보다 특별할 것 없던, 크리스마스였다.

이틀 전 시험이 끝난 고등학생 아들은 3주 동안 끊었던 게임의 한을 푸느라 쪽잠 자가며 폭주중이고 큰아들은 끝나지 않은 입시 때문에 아침부터 학원에 갔다. 아침부터 "오늘 우리 뭐해?"라고 물으며 칭얼대던 남편은, 정작 산책이라도 갈까 물으면 대답이 없었다. 이브날 마신 와인 몇 잔에 술병이 나버린 나는 1년 만에 찾아온 숙취를 만끽하며 종일 자고 깨고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베란다 수납장에 버려지듯 팽게 쳐둔 '그것들'이라도 꺼내와야 하나 갈등했다.

고민만 하고 말았다. 몸은 천근만근이었고, 그냥 지금 이렇게 누워서 얼마 전 정주행을 마친 웹툰 "스위트홈"과 동명의 드라마나 실컷 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쉬는 날에는 아이들과 무엇을 해줘야 한다는 강박이 컸다. 아이들 어렸을 시절, 에버랜드 가족 연간회원권을 사놓고 본전을 뽑고도 남을 만큼 드나들었다. 차 타고 어디라도 돌고 와야, 외식이라도 해줘야 보람찬 주말을 보냈다고 생각했다. 집에 있어도 다르지 않았다. 책을 읽어주고 함께 숨바꼭질을 해주거나 '유희왕 카드' 놀이라도 해줘야 좋은 엄마라고 여겼다.

그런 마음으로 장만한 것이 장기판과 체스판이었다. 무겁고 자리 차지하는 장기판은 싫었고 하나를 사면 판을 바꿔가며 장기, 체스, 바둑까지 둘 수 있다는, 경박스러워 보이는 판도 싫었다. 뭔가 뽀대 나면서 아이들도 좋아할 만한 게임판을 '내가' 원했다. 정작 아이들은 관심도 없었을 것을...


십여 년 전, 동생과 함께 간 홍콩의 어느 뒷골목에서 허름해 보이는 골동품 가게에 들어갔다가 맘에 쏙 드는 장기판을 발견했다. 진짜 골동품이라고 믿었던 것은 아니었다. 공장에서 찍어냈어도 골동품스럽게 보이는 기술을 가진 어떤 이에 의해 다듬어졌겠거니 했다. 아이들 선물이라며 사놓고는 내가 더 좋아했던 < 앤틱 장기판 >. 물론 아이들도 좋아했다. 수시로 들고 와 장기를 두자고 하는 통에 귀찮은 마음이 들었고 괜히 사 왔다며 잠깐 후회도 했다. 그래도 한동안 본전은 뽑을 만큼 갖고 놀았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는지, 어린이날 선물이었는지 기억도 안 날 만큼 까마득한 옛날 옛적, 학교에서 보드 게임 교실을 다닌 아들을 위해 < 트랜스포머 체스 > 판을 준비했었다. 1,2편이 나왔을 무렵이었다. 체스판이 종이라는 게 마음에 안 들었지만 주석으로 만든 것 같은 착각이 일게 색칠한 오토봇과 디셉티콘 말들은 뽀대가 났다. 아이들이 트랜스포머에 빠져 살 때였기에 만족스러운 선물이었다. 눈만 뜨면 한판 붙자고 들고 오곤 했다. 서로 디셉티콘 편은 안 하겠다고 싸우기도 했고, "아이 엠 옵티머스 프라임~"이라고 흉내를 내가며 말을 움직이던 재미가 있었다.

레고나 변신로봇 같은 장난감과는 달리 보드게임은 상대가 필요하다. 형제가 함께 놀아도 되건만 원활하고 공정한 게임 진행을 위해 꼭 엄마나 아빠가 함께 하기를 원했다. 내 딴에는 돈 들여 사준 게임들의 효용가치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꾸역꾸역 놀아주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연휴엔 보드게임이든 카드게임이든 온 가족이 마루에 모여 함께 시간을 보냈다. 가족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고 어디에 쓰여있기라도 했던 걸까.


지금은, 각자도생이다.

혼자서도 충분히 즐거울 것 천지다. 장기건 체스 건 누워서 손가락만 움직이면 얼마든 즐길 수 있다. 말들을 제자리로 하나하나 옮겨 주어야 하는 번거로움도 없고 몇 대 몇인지 기억을 더듬느라 옥신각신할 필요도 없다. 각자의 침대에 누워 여유롭고 편안하게, 지루할만치 유유자적하며 시간을 보낸다.

휴식다운 휴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 시절 우리는 가족이라는 미명 하에 용을 쓰고 살았던 것 아니었을까. 부하직원이 쉬는 날 상사의 부름을 못 이기고 등산에 합류하는 것처럼, 집에 가서 쉬고 싶지만 자신의 고민 좀 들어달라는 친구와의 술자리를 마다하지 못하는 것처럼...

'귀찮지만 아이들을 생각해 한판만 더 해주자, 모처럼 쉬는 날이니 아이들과 몸으로 놀아줘야겠다'라고 생각하던 엄마 아빠와,

'엄마가 우리들 생각해 어렵게 구한 보드게임이니까 몇 판 해드리자, 아빠가 모처럼 우리들이랑 놀아주고 싶어 하니 축구 한판 해드리자.'라고 생각하며 마지못해 응했던 아이들.

이렇게 서로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춰가며 집에서도 사회생활하듯 지냈던 시간은 아니었을까?


지금이라도 당장 보드게임을 주섬주섬 꺼내와 한판 하자고 한다면 '흔쾌히'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두 판은 해주겠지 싶지만. 쉬는 날은 집에서도 온전히 자신만의 쉼을 허하고 싶어 졌다. 수납장 속에 버려진 장기판과 체스판은, 혼자 놀다 놀다 지치는 날이 오면 언젠가 누구라도 꺼내보지 않을까. 다 같이 신나서 달려들어 판 벌려 보는 날, 오지 않을까.

keyword
이전 11화너와 나의 연결고리 이건 우리 안의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