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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Jan 02. 2021

눈 씻고 찾아보지 않아도 보이는 진정성

< 넷플릭스 오리지널 - 차인표 >

남편의 셔츠 여러 장을 한꺼번에 몰아서 다릴 때마다 TV를 본다. 기계적인 집안일을 할 때는 뭐라도 봐야 시간이 덜 아깝기 때문이다. 뭘 볼까 둘러보는데 넷플릭스에 방금 올라온 따끈따끈한 영화 한 편이 눈에 들어왔다. 몇 달 전 예고편을 보며 관심이 갔던 영화였다.  <차인표>


오른쪽 두 번째 손가락 하나로 대한민국을 평정했던 무서운 신예, 드라마 속 연인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봉사와 기부 등의 미담과 함께 반듯한 이미지를 가진 배우 '차인표'.

왕년의 인기와 이미지를 끌어안고 사는 배우가 우연한 사고를 당하면서 물거품 같던 과거를 벗어내고 새롭게 태어난다는 내용이다. 뻔한 스토리라인이지만 왠지 기대를 하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차인표라는 배우에 대한 고착화된 이미지를 깨줄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

'넷플릭스 오리지널'이라고 내건 몇몇 작품을 본 후 갖게 된 신뢰.

'극한직업'의 제작사가 넷플릭스와 손잡았다는 대대적인 광고.

그 모든 것에 이끌려 재생 버튼을 눌렀다.


다림질은 30분 만에 끝냈지만 이왕 시작한 영화를 중간에 자를 수는 없었다. 흥미진진해서라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보다는 뭔가 나오겠지, 뒤로 가면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있겠지 하는 작은 기대가 있었달까?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도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여운이 남아서가 아니었다. 머릿속이 멍해졌기 때문이다.

'내가 이 영화의 심오한 메시지를 잘 파악하지 못한 걸까? 내가 모르는 요즘의 '밈'이라는 게 있나? 병맛, B급 감성을 딱히 싫어하는 사람은 아닌 나이건만 이 영화는 어떤 감성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다음날 아침, 맘 카페에 어떤 분이 쏘아 올린 영화 감상평에서 답을 찾았다.

"꼭 보세요! <차인표>! "라는 제목으로 "나만 당할 수는 없어요. 낮에 먹은 떡국이 소화가 안된 건지 간식으로 먹은 고구마가 뻑뻑했는지, 영화 끝나고 사이다를 두 잔 마셨어요. 감독이 차인표를 5년이나 설득했다지요. 5년을 버텼으면 끝까지 버틸 것이지... 영화를 추천한 남편도 진심으로 저에게 사과했어요. "라는 친절한 후기가 올라와 있었다.

댓글이 넘쳐났다. 배우들 연기력은 왜 쓸데없이 고퀄이냐는 이야기부터 이 영화를 견뎌낸 사람은 올 한 해 어떤 일이든 극복할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덕분에 영화가 궁금해 죽겠다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장안의 화제가 된 것은 분명했다. '도대체 어떻길래?'라는 호기심 유발이 영화감상으로까지 이어져 '생각보다 괜찮던데?'로 마무리됐다. 고도의 홍보전략이 아닌가?

<차인표>는 생각하지 말라고 하니 머릿속에서 하루 종일 차인표가 떠나질 않는 것이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제대로 프레임을 걸어버린 것 아닌가.


영화 속에서 차인표가 주야장천 이야기하는 것은 "진정성"이었다.

성에 차지 않게 일하는 매니저에게 "실수를 해도 좋고 느려도 좋아. 우리 그냥 진정성만 갖고 일하자!"라고 따끔하게 조언한다. 스타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매니저의 진정성은 모른 채 말이다. 왕년의 이미지를 고수하는 것이 진정성 있는 스타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던 주인공이 그간의 쌓아온 이미지가 벌겨벗겨지는 극단적 상황에 놓이는 과정을 다룬 영화. 그 뻔한 스토리는 가상의 주인공이 아닌 실제 '차인표'라는 인물을 내세움으로써 영화에 대한 몰입도를 최고치로 끌어올렸다.

'왕년에는 나도'라며 과거 잘 나가던 시절을 회상하는 이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며 현재의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차인표 역시 순순히 과거의 자신을 내려놓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묘한 동질감과 안도감을 전해주지 않았을까. 차인표가 보여주고자 하는 '진정성'의 가치가 영화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영화인가 실화인가" 고민하게 될 정도다.

'현란한 볼거리와 잘 짜인 스토리, 시종일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전개, 영화가 끝나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게 하는 여운'을 주는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도 배우의 '진정성'있는 연기와 삶은 그대로 전해지니 성공한 영화다 싶다.


1997년 봄. 남편과 결혼하기 3년 전이었다. 아버님이 암투병 끝에 돌아가셨다. 비통해하는 남자 친구 옆을 떠날 수가 없던 철없던 나는 3일 밤낮 장례식장을 지켰다. 빈소 앞에서 신발을 정리하는 것으로 나의 역할을 정해놓고 입구에 서 있었다.

둘째 날이었던가? 어머님 연세 정도 되어 보이는 부부가 빈소를 찾으셨다. 여느 조문객과 같았다. 조용히 신발을 벗고 국화꽃을 한 송이씩 들어 아버님의 영정사진이 놓인 영좌 앞으로 향했다. 헌화를 하고 향 하나를 집어 불을 붙이고는 절을 하셨다. 상주들과 맞절을 하신 후 조용히 빈소를 떠났다. 남자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오시는 손님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누군가가 친절히 설명해주기 전까지는...

손님이 가신 후, 그때까지 물 한 모금, 밥 한 숟가락 넘기지도 못하시고 초주검이 되어계시던 어머님이 천천히 내게 걸어오셨다. 검은색 복을 입고 한 손에는 흰 손수건을 꼭 쥐셨다. 이미 퉁퉁 부었지만 언제든 눈물을 쏟을 준비가 되어있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시며 건네신 말씀은....

"차인표 엄마 아빠야..."였다.

"네?"

예상치 못한, 맥락 없는 말씀에 내가 잘못들은 줄 알았다.

"방금 다녀가신 분들... 차인표 엄마 아빠라고..."

그 말씀만을 남기신 채 다시 뒤돌아 상주 자리로 돌아가신 어머님... 당시에는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몰랐고 엄숙하고 슬픔이 가득 찬 장소였기에 곱씹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후로 상갓집에 갈 때마다 이 장면이 생각나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게 돼버렸다.


내 기억 속에서 '차인표'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그렇다.

슬픔에 매몰된 어머님이 예비 며느리에게 자랑하고 싶을 만큼 대단한 스타이자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

<접속>,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괴물>은 고사했지만 <차인표>를 선택한 진정성 있는 배우.

이 영화가 던져놓은 프레임에 제대로 갇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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