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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Jan 26. 2021

아싸! 찾았다! 나의 글감!

쓸거리가 넘치는 어제였다.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아도 깊이 사색하지 않아도 되는 날. 제 발로  찾아와 날 잡아먹으라며 통통거리는 소재를 손쉽게 낚아채기만 하면 되는 날. 하지만 남편은 그러지 말라고 했다. 가족의 아픔, 누군가의 죽음, 타인의 고통을 글의 소재로 소비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넌지시 말했다. 그러겠노라 했다. 그들을 비난하거나 조롱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 위로하고 어루만져주기 위함이라도 결국, 내 의도와는 달리 결과는 '소비'가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더니,

"당신의 글감으로 나 하나면 충분하지 않아? 나라면 얼마든 갖다가 써도 좋아. 내 몸이 갈기갈기 뜯긴다 해도 당신을 위해서라면 얼마든 내어줄 수 있어."라고 말하는 듯 자신을 내밀었다.

오늘의 글감이 '남편'인 이유다.


남편은 중년의 중병을 앓고 있는 중이다. 병명은 못 지었다. 열거하는 증상을 보고 병명을 아시는 분이 있다면 제보해주시기를...


첫 번째 증상은, 아들과 자신의 밥상을 비교하는 것.

속이 더부룩하고 입맛이 없어서, 혹은 살을 빼기 위해 저녁식사를 안 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퇴근을 한 남편은, 가스레인지 위의 냄비 뚜껑을 한번 열어보거나 냉장고 문을 열고 우두커니 서있다가 "쬐~끔만 먹을까?"라고 한다.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당황한 나이지만 주부 된 도리로 밥상을 차려낸다. 이리저리 분주해하는 나에게 "찌개 하나면 돼! 뭐 많이 주지 마." "젓갈 하나에 김만 먹을 거야!"라며 제법 호탕하고 배려 깊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게 정말, 소비자의 needs에 부응해 단출한 저녁식사를 준비하면 맛있게 잘 먹어주는 남편이다. 딱 거기까지만 하면 되는데... 이후에 속속 도착하는 아들들의 밥상을 보며 꼭 한 마디씩 하는 게 문제다.

공부하느라 지친 아들, 운동하느라 진이 빠진 아들, 고기고기를 외치는 아들을 위해 항시 대기 중인 냉동실 속 고기를 구워 내면 남편은 한마디 한다. "아, 아들들은 고기 궈주고..."

별다른 저의가 없음을 안다. 아들들이라면 자신의 살도 내어줄 사람이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 내가 아는 그에 대한 모든 것을 무용하게 만드는 한마디가 바로 그 말이다. 한 달 뼈 빠지게 일해 생활비를 줬는데 고기 한 도 못 얻어먹었다는 슬픈 가장 코스프레를 하는 것인지...


두 번째 증상은, 주말만 되면 집을 나서는 것.

집에 오면 온전히 '쉼'을 하게 된다는 남편이지만 주말에 하루 종일 늘어져 있는 자신은 보기 싫어한다. 뭔가, 취미를 공유하는 부부의 삶을 원하는 건가 싶어 등산이나 영화감상을 권해보지만 호응이 없다. 그러다가는 책가방을 짊어지고 집을 나선다. 근처 도서관에 가던가 사무실에 나가서 책이라도 읽는단다. 그러면서 또 한마디 덧붙인다. "내가 없어져야 글이 잘 써지지..."

아오.. 누가 들으면 아내가 무슨 대단한 작가인 줄 알겠다. 집필에 방해된다며 주말에 쉬는 남편을 내쫓는 이기적인 작가. 베스트셀러라도 쓰는 작가라면 그런 유세도 해볼 만할 테지만, 브런치 작가일 뿐인 내가 글 쓰겠다고 남편을 내보낸다니... 물론 아무래도 남편이 집에 있는 날엔 뭘 쓰기가 거북스러운 게 사실이었고 그래서 주말엔 글쓰기를 포기했다. 하루 이틀쯤 못쓴다고 무슨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라고 나를 다독였다. 그런데 그게 또 마음 쓰였던 남편은 주말에도 집을 나선 것이다. 자기 명의의 집에서조차 편히 발 뻗고 쉬지 못하며 탑골공원 비슷한 곳을 찾아다니며 배회하는 쓸쓸한 중년 가장 코스프레를 시전 한다.


그가 앓고 있는 중년의 중병은 대체 어디서 비롯되었고 어떻게 치유가 가능한 것인지...

오늘 아침만 해도, 출근하는 남편에게 수프를 끓여줄까, 아니면 고기라도 구워줄까 농을 던졌지만 속이 더부룩해 그냥 가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출근하자마자 톡을 보내왔다. "배고파..."


내가 진단하는 병명은, '관심병'이다...

치료법은, 질릴 때까지 그를 소재로 글을 써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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