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봄유정 Feb 25. 2021

쓸모 있는 쓸모의 역사

1단계

뜻하지 않던 곳에서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제안을 해온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적절한 페이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양해와 함께... 오래 고민하지도 않고 승낙해 버린다. 주로 '경력이 쌓이거나 새로운 영역에 대한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달콤한 이유로 나 자신을 설득한다.  쓰임새 있는 사람이라는 것에 안도, 위안을 얻기도 한다.

교통실비밖에 지급하지 못한다는 교육청 일도 관대하게 받아들인다. 사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이 공교육의 한 꼭지를 경험한다는 것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2단계

야심 차게, 열심히 참여한다.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내고 크고 작은 회의에도 모두 참석한다. 한 자리를 맡아달라고 해도 구실을 찾지 않는다. 나를 필요로 했던 이들의 안목과 선택이 나쁘지 않았음을 몸소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이거나, 평판을 상당히 의식하기 때문이거나 원래 뭐든 열심히 하는 사람이거나... 어쨌든 최선을 다한다.


3단계

슬슬 회의가 들기 시작한다. 내가 좋아서 수락하고 참여한 일이면서 제대로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것에 불만이 생기고 수시로 갖다 쳐야 하는 나의 시간이 아까워진다. '내가 편하게 대놓고 쓰는 사람인가?'라는 의구심은 '난 그저 그 정도의 능력만 인정받고 있는 거구나...'라는 자괴감으로 이어진다.

불편한 심기는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내고야 마는 성격이라, 내 딴에는 완곡하게 유머를 섞어 말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듣는 이는 당황스러울게 분명하다. '좋아서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왜 저래?'라고 생각하거나 '보상을 해줄 길이 없는데 이를 어쩐다? 미안하기는 하지만 방법이...'라며 상대의 마음이 불편해질게 뻔하다.

자발적이며 무보수로 참여하는 자원봉사의 경우는 이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 봉사자 모두가 나와 같은 상황이니 비교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일반적인 업무를 하며 협력자로 불러놓고 나의 호의를 당연스레 여기는 것에 대해서는 화가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한다.


4단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간다. 내가 선택한 일이다. 단순한 호기심, 경험에 대한 욕구, 노느니 단돈 몇 푼이라도... 등의 이유로 나를 설득시켰던 초심. 그래서 다시 나의 작은 쓸모라도 건져 올려준 상대에게 감사하고 그 쓸모가 쌓이고 쌓여 나의 역사가 되리라 위안을 한다. 그래서 다시 비슷한 상황에 놓이면 1단계부터 시작한다.



내 쓸모와 가치를 헐값에 팔아버리곤 하는 내가 너무 한심스럽다고 여길 때가 있다. 티끌 같은 자기 효능감을 찾으려다가 그나마 있던 효능감도 바닥나는 기분이 들 때... 여러모로 나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상황들이다.


그런 나는,

나 자신에게 나쁜 사람이다.

조금이라도 부담되거나 미혹한 부분이 있다면 안 하면 그만인데 구태여 일을 만든다. 그냥 가만히 좀 있어도 될 것을 가만히 있는 것이 큰 범죄라도 되는 것처럼 나 자신을 가만두지 못해서 생긴 일이다. 몸을 가만두지 못하더니 결국 마음까지 가만두지 않으니 자신에게 이보다 나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상대에게도 나쁜 사람이다.

날 작게 보았거나 크게 보았거나, 가볍게 여겼거나 무겁게 여겼거나, 이용하려 했거나 활용하려 했거나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날 필요로 한 이다. 충분한 대가를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에게 감사해하거나 미안해하는 마음이 소홀해졌다는 이유로 나 혼자 토라져 미워하는 마음을 품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상대 입장에서 나는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입장이 완전 다른 사람의 전형'이 될 뿐이다.


사회에도 나쁜 사람이다.

시장을 교란시켰다. 나로 인해,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아도 일해주는 사람이 있다는데...'라는 선례가 만들어질까 두렵다. '대체 누구야? 누가 바보같이 일하고 돈도 제대로 안 받아서 다른 사람들까지 피해 보게 만드는 거야?'라고 말해도 할 말이 없다.


나쁜데 바보이기까지 하다.

모두 잊고 다시 1단계로 돌아가 반복하니 말이다. 최악의 경우다. 나쁜데 머리도 나빠...


내일이라도 당장 내가 필요하다고 하면 다시 눈썹 휘날리며 달려갈 나짧은 쓸모의 역사 한 페이지라도 작성하려고 애쓸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이라도 하는 게 최선이라며 당위성을 찾아낸다. 그 역사가 쌓여 언젠가 빛을 볼 날이 있을 것이라는 이상주의에 빠져 현실의 괴로움을 또 망각해버린다...


그러니 단계별로 내 문제점을 분석하고 나의 쓰임새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

1단계에서는 과감함이 필요하다. 정에 이끌려 마비된 이성으로 판단하지 말고 계산기 좀 제대로 두드리길..

2단계에서는 평판 등의 외적 동기가 아닌 내적 동기에 집중하길... 그래야 억울함이 덜할 테니..

3단계에서는 난 딱 그만의 쓰임새만을 인정받았으며 나도 그것에 동의한 것임을 기억하길... 급똥을 해결하기 위해 화장실의 컨디션은 보지도 않았던 마음, 거기에 마침 화장실이 있어줘서 천만다행이다라는 감사함이 화장실을 나서며 '뭐 이렇게 더러운 데가 다 있어?'라는 불만으로 변질되지 않기를...

4단계에서는 인정받은 쓸모만큼은 일을 했는지 객관적으로 생각해보길... 불평불만으로 시간을 보내지 말고,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먼 훗날 과거를 돌아봤을 때,

모든 순간이 쓸모 있었다고 여겨지기를 소망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임신에서 출산까지, 며느라기에서 셤니기까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