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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Aug 01. 2021

가스 라이팅 당하다.

동네 친한 언니가 파마를 했다. 평소와 달리 뽀글뽀글 말아놓은 머리가 신기하고 웃겼다.

"잘 어울린다~ 나도 파마하고 싶." 했더니,

"여름엔 뽀글 파마지~ 너도 파마해~ 나랑 똑같이 해라!" 라며 분위기를 몰아갔다.

옆에 있던 내 친구 순자도 가세했다.

"그래. 너 언니랑 똑같은 파마 해라. 알았지? 초록색으로 말았대. 너도 꼭 초록색으로 말아~"


그리하여 파마를 하게 됐다.

16년째 단골인 미용실, 16년째 내 머리를 만져주고 있는 실장님에게 찾아갔다.

사실 난, 1년에 한 번 파마를 해 왔다. 가장 굵은 놋트로 말고서 한 듯 안 한 듯 자연스럽게. 내 선호가 담긴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냥 아무 말 않고 자리에 앉으면 실장님이 아무 말 않고 알아서 해줬다. 파마가 끝난 후 뒷머리를 보여주겠다며 실장님이 작은 거울을 갖고 오면, "에이, 됐어요~"하고 그냥 나왔다.

이틀이 지나고 머리를 감았을 때, 생각보다 파마가 안 나와도 그런가 보다 했다. 파마 후 일주일 후에 영양을 받으러 다시 오라고 해도 가지 않았다. 귀찮기도 했고 시간이 아깝기도 했다.

기호도 없고 열정도 없는 손님이었다.


이번엔 달랐다.

뽀글 파마머리의 지인 사진을 들이밀며 "이렇게 해주세요."라고 주문했더니 적잖이 당황한 실장님.

"언니, 진짜 괜찮으시겠어요? 많이 뽀글거릴 텐데?"라고 몇 번을 확인했다.

"그냥 해주세요. 금방 풀릴텐데요 뭘."

세상에서 제일 따분하고 아까운 세 시간을 버틴 끝에 파마가 끝났다. 이전보다 더 곱슬 거리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기분전환은 됐다. 당장 사진을 찍어 톡방에 올렸다.


이때부터 시작됐다.

친한 언니와 순자는 끊임없이 떠들었다. 톡에서도 구시렁거리더니 만나서는 더 했다.

"그게 뭐야! 하나도 안 똑같잖아."

"어딜 봐서 뽀글 파마니? 옛날에 했던 거랑 같은데. 너 똑같이 해달라고 안 했지?"

"너 못됐다. 똑같이 한대 놓고선 굵은 걸로 말았네."

"다시 해달라고 해. 한번 감으니 다 풀렸네~"

"돈 아깝다. 다시 해달라고 해~ 그럴 권리 충분히 있어. 내 돈 주고 파마하면서 왜 말을 못 하니?"

"유정이는 그런 말 못 해. 알잖아~ 다시 해달라고 절대 말 못 할걸?"


자기들끼리 결론까지 다 내놓고 있었다.

"나도 말할 수 있다 뭐! 내일 아침에 다시 감아보고 너무 풀렸으면 다시 갈 거야. 가서 다시 해달라고 할 거야."

오기가 발동한 나도 지지 않고 내질렀지만 내심 고민이 됐다.

'한 번도 머리 다시 해달라고 한 적 없는데 어떻게 하지? 내 머리가 원래 파마가 잘 안 나오는 머리라고 하면 뭐라고 말하지? 돈을 좀 더 내야 하나?'

내 고민을 용케도 알아내고 그 둘은 또 날 밀어붙였다.

"안 되겠다. 내일 우리랑 같이 가자. 너 혼자 못 보내겠다. 애한테 카드 쥐어주고 혼자 미용실 보내 놨더니 애라고 얕보고 아무렇게나 해놓은 거랑 같잖아. 이게 뭐니? 이래서 우리 같은 어른이 같이 가줘야 되는 거야. 우리 유정이 애라고 무시한 거야 뭐야?  하하하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다음날, 파마 후 두 번째로 감은 머리는 한 달은 된 것처럼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 둘에게 걸리면 당장 또 잔소리 폭격이 날아올 테니 나 혼자 미용실 가서 수습하기로 했다. 심호흡을 하고 미용실에 전화를 걸었다.

"저기요, 저 호재 엄만데요, 머리를 감았는데 파마가 너무 풀린 것 같아서........"

"아, 네~~ 언니~~ 아무 때나 편할 때 오세요~ 다시 말아드릴게요~"

너무 쉽게 수락해줬다. 이게 이렇게 쉬운 일이었나? 이 쉬운걸 여태 주변머리 없이 말도 못 하고 매번 그냥 넘어간 거였단 말인가?


다시 미용실에 가고, 다시 시간을 들이고, 다시 머리를 말았다. 다행히 추가 비용을 지불하지는 않았고, 다행히 머리가 한껏 뽀글해졌다. 파마를 권했던 언니보다도 더 심하게 뽀글거렸다.


인증숏을 찍어 "됐냐?"라는 말과 함께 톡방에 남겼다.

'이제는 아무 말도 못 하겠지. 좀 조용해지겠지? 아휴.. 징한 사람들...'

사진을 본 그들은...

"야! 그게 뭐냐? 앞머리는 왜 안 말았냐?"

"그러게? 앞머리까지 뽀글거리게 말아야지~"


나는 그들에게  "나 조종당하고 있는 거 맞지?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그루밍? 맞다! 가스 라이팅! 가스 라이팅 당한 것 같아!"라며 팔팔 뛰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심 좋았다.

아무 말 못 하고 미용실에 머리를 맡겼던 내가 처음으로 실장님께 반기를 든 것이 신기했다.

샴푸질 두 번 만에 힘없이 풀어져버린 머리를 용기 내어 되찾은 것이 자랑스러웠다.


* 가스 라이팅 *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

가스 라이팅 가해자는 피해자의 기억을 지속적으로 반박하거나 실수를 과장하는 왜곡을 통해 피해자가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든다.

전문가들은 스스로 가스 라이팅 피해자라는 사실을 자각한다면 얼마든지 가스 라이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타인에 의해 내 인생이 좌우되지 않도록 자존감을 회복하고 내 삶에 대한 뚜렷한 주인의식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 출처 : 네이버 시사상식사전 >


16년 동안 미용실 실장님에게 조종당해왔는데 제삼자의 조종을 통해 기존의 조종에서 벗어났다는 아이러니...

남들은 자유를 원한다지만, 머리에 있어서만큼은 난 복종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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