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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Mar 18. 2021

관종의 생일상

"전 먹는 거에 별로 관심 없어요~"

"이 나이에 생일은 무슨~"

이 두 마디를 싫어한다. 아니, 이 말을 하는 사람은 다시 보게 된다.


첫 번째 발언은 열심히 먹는 사람, 먹는 거에 진심인 사람을 무안하게 한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거지~", "기왕이면 맛있는 거 먹읍시다~"라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 저 말을 하는 사람은, '세상에는 먹는 것보다 더 고매하고 우월한 일, 다급한 일이 있다는 걸 모르는군', '먹을 거에 연연하는 것만큼 시간낭비, 에너지 낭비가 어디 있다고?'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글쎄... 잘 먹고 잘 싸는 것만큼 잘 사는 게 또 있을까? 다양한 생각은 인정하지만 잘 먹는 내 앞에서 "전 먹는 거에 별로 관심 없어요. 아무거나 대충 배만 채우면 됩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보게 될 것이다. 아주 두꺼운 색안경을 쓰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먹는 거에 관심 없다는 사람 치고 주는 대로 먹는 사람을 못 봤다. 늘 이건 이러네 저건 저러네 구시렁거리기 일쑤... 사람이라면 누구나 먹을 거에는 진심이라는 나의 소신을 굽히지 않겠다...


생일에 관심 없다는 두 번째 발언은, 나이를 먹어가는 많은 이들이 습관처럼 내뱉는 말이다.

인간은 모두 관종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이 발언에도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관종'이라는 말의 어감이 쎄서 그렇지, 그 단어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의 또 다른 말이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이 부담스러워서일까, 겸손의 미덕이라고 생각해서일까? 손사래를 치며 생일상 받기를 거부하는 이들조차도 혼자 맞는 생일은 쓸쓸할 것이라고, 이 역시 내 마음대로 추측해본다.


어렸을 때, 미역국 대신 콩나물국을 먹으며 서럽게 울던 날이 떠오른다. 바쁘신 와중에도 딸의 생일을 챙기기 위해 노력하셨을 엄마 아빠에 대한 고마움 대신 잘 챙기다가 깜빡했던 몇 번이 속 좁은 내 기억 속에 화석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생일에 미역국을 안 먹으면 서운하다. 가족이 끓여주기를 기대, 강요하는 대신 미역국이 나오는 식당에 가서 배불리 실컷 먹으면 된다. 미역국에 더해, 가족들이 2,3만 원씩 모아 살 수 있는 수준의 선물을 요구해 기어이 받아낸다. 이렇게 나는 '당찬 관종'이다.

흔히들 '받아서 맛인가?'라고 하는데, 받아서 맛이다. 적어도 가족이라면 함께 사는 사람의 생일은 챙겨줘야 한다. 그게 예의라 믿는다. 가족 말고 맘껏 관종 짓을 풀어낼 수 있는 상대가 어디에 있겠는가? 가족 말고 상대의 관종 짓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대신, 카톡, 페이스북 등에는 생일이 노출되지 않도록 설정해두었다. 생일이면 여기저기서 전해오는 커피 쿠폰, 케이크 쿠폰 등이 부담스러웠다. 그 마음이 고맙고 선물이란 받으면 기쁘기 마련이지만, 끝도 없이 오고 가는 기브 앤 테이크를 누군가 끊어야 한다면 내가 나서서 하겠노라 다짐했기 때문이다.



어제는 먹는 거에 관심 없고 생일상 받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이의 생일이었다.

생일을 며칠 앞두고 어머님 댁에 다녀온 그는 갈비 한 상자와 돈봉투를 내밀었다.

"어머님이 이 갈비 애미한테 해달라 하래~ 그냥 해달라 하기 그러니까 봉투도 같이 주라고 하시네?"

엥? 이게 말이냐, 방귀냐? 심히 마음이 불편했다.


일단 나는 남편 생일상도 안 챙겨주는 사람이 아니다. 내 생일상 안 받았다고 치사하게 복수하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밥에는 진심이라고 몇 번을 말하는가? 매일 도시락도 싸주는걸?

어머님이 진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그걸 고대로 전하는 남편은 나빴다.

혹시 어머님은 그렇게 말씀 안 하셨는데, 남편이 자기 생일상용 갈비를 아내에게 주는 것이 미안하여 지어낸 말이라면, 그래도 남편은 나빴다.

이래도 저래도 남편의 발언은 적절치 못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 부쩍 말과는 다른 행동으로 아내의 관심을 갈구하는 남편을 이해하기로 했다.

먹는 거에 관심 없다지만 꼬박꼬박 아내가 싸준 현미밥 도시락으로 식단 조절을 한다. 아이들 반찬과 자신의 반찬을 끝도 없이 비교한다. "남편 도시락 싸느라고 아침부터 이렇게 바쁜 거야?"라고 말할 땐 만면에 미소가 넘쳐난다.

이 나이에 무슨 생일이냐고 하면서도 이번 주는 자기 생일 주간이니 자유로운 스킨십을 허락하라고 조른다.

아마 자신의 말대로 갈비찜은 커녕 미역국도 없는 생일, 아무도 축하해주지 않는 생일을 맞이하면 말할 수 없이 우울해할게 뻔해 보였다.


생일 전날, 분주히 움직였다.

여러 번 핏물을 뺀 갈비를 물에 튀겨냈다. 깨끗이 씻은 갈비에 배, 양파, 마늘을 갈아 넣고 물, 간장, 설탕, 생강가루, 후추를 넣어 끓였다. 끓이고 식혀 기름을 걷어내기를 두 번이나 했다. 생일 아침, 마지막으로 끓여낸 갈비찜은 제대로 졸여져 있었다.

냉동실에 모셔두었던 보리굴비 다섯 마리를 꺼내 찜기에 쪘다. 온 집안에 비린내가 진동했지만 이래야 잔칫집 같지... 에어 후라이어에 두 마리를 넣고 십여분 돌려주니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한 보리굴비가 완성됐다.

미역국은 끓일수록 맛있는 법. 전날 밤에 끓여놓았던 미역국을 아침에 다시 끓였다.

오이와 달래에 소금, 설탕, 식초, 고춧가루 넣고 슴슴하게 무쳤다. 나물 대신이다.

전, 잡채는 없지만 이 정도면 생일 도시락으로 손색없겠지 싶다.


"당신 아들 주려고 아침부터 갈비찜 한 거야?"

아침부터 남편이 또 긁는 소리를 하지만 참자... 오늘은 그의 생일이니...

저런 말을 내뱉을 때마다 흘겨보고 등판을 때리는 아내의 반응을 즐기는 관종이 아니더냐.

늘 아내의 관심을 받고 싶은 '관종'은 그렇게 생일 도시락을 싸들고 출근을 했다. 그런 그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도시락 인증샷 찍어서 꼭 어머님께 보내드려~~~."


남편의 생일상 하나 차려놓고 이렇게 호들갑스럽게 글을 쓰는 나도 관종이다. 관종이 아니라면 대체 뭣하러 글을 쓰겠는가... 남편이 생일 도시락을 열며 어떤 마음이었는지, 생일 도시락 사진을 본 어머님은 어떤 반응이셨을지가 궁금해 미치는 것 역시 내가 관종이기 때문이다.


종일 바빠 첫 끼니를 7시에 했다는 남편은, "생일이라고 뭐 특별한가?"라며 대수롭지 않은 척했다. 아이들과 내가 돈 모아 장만한 새 신발을 뜯어보면서도, "이런 건 왜 해~ 신발 있는데~"라며 얼마냐, 비싸냐를 연신 물었다.

하지만 아침 출근길에 새 신발을 신어보며 키높이 신발인 것 같다며 좋아하는 그는, 영락없는 관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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