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가게 복기록
상가 계약을 한 후 프랜차이즈 본사로 가서 가맹계약을 맺었다. 우리는 그 회사의 49번째 매장이었다. 첫 번째도 아니고 백 번째도 아닌 그 숫자가 기억날게 뭐람.
가맹계약을 하고 나니 일주일 동안 교육을 받으러 오라고 했다. 후라이드 파우더 반죽 비율, 전기구이 기계에 치킨을 꽂아 넣는 법, 크리스피 치킨의 튀김옷이 꽃처럼 피어나게 하는 법, 접시에 기름종이를 깔고 치킨을 예쁘게 놓는 법, 골뱅이 무침과 어묵탕 조리법, 생맥주 따르는 법, 테이블 세팅하는 법 등을 배웠다. 배우라니 배우긴 하는데 내가 할 일이라기보다는 직원에게 잘 가르쳐주기 위해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고로 사장이란 카운터에 서서 매장을 관리하고 나가는 손님 계산을 해드리는 것이 아니던가. 컴퓨터 모니터처럼 생긴 포스기와 카드 결제하는 법만 제대로 익히면 되지 않겠는가. 동네 작은 치킨집도 아니고 테이블이 15개나 있는 카페형 치킨집이 아니더냐. 내 손에 물 묻히고 기름 앞에 설 일이 있겠는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와 남편의 오른쪽 팔뚝은 성할 날이 없었다. 치킨을 튀김기에 넣을 때마다 튀어 오른 180도의 기름방울로 데인 자국은 담배빵마냥 쌓여갔다. 주방 실장님이 쉬시는 날은 남편과 내가 주방을 도맡아야 했으며 카운터에 서는 일은 마감 정산할 때뿐이었다. 바쁜 날은 주방에 콕 박혀 바깥공기 한번 맡기 힘들었다. 치킨집 사장은 그런 거였다. 치킨을 가장 많이 튀기는 사람.
두어 달간의 준비를 마치고 더운 여름이 다 지난 11월에 오픈을 했다.
시루떡을 준비해 간단하게 고사를 지내고 주변에 몇 개 안 되는 가게들에도 떡을 돌렸다. 첫 손님을 맞았다.
오픈빨로 처음 한동안은 정신없이 바빴다. 사장인 우리 부부는 장사가 처음이었고, 주방 실장님으로 뽑은 분도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아르바이트생을 못 구해 친구 동생이 와서 도와주었다. 그래도 어찌 됐든 시작을 하니 굴러는 갔다.
그 와중에 어린아이들을 집에 두고 왔으니 나는 하루에도 두세 번씩 30분 거리에 있는 집과 매장을 왔다 갔다 했다. 가게에선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 정신없었지만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는 아이들 생각에 맥이 풀렸다. 학교가 끝나고 엄마 없는 집에 들어왔을 큰아이 생각에 한번, 유치원이 끝나고 집에도 못 들린 채 태권도 학원으로 갔을 작은 아이 생각에 또 한 번 눈물바람을 했다. 저녁을 챙겨 먹이고 일찍 재운 후 가게로 다시 향할 때는 아이들만 두고 가는 게 불안해 발길이 안 떨어졌고, 가게가 바쁘다는 호출에 재우지도 못하고 급히 나설 때면 미안함에 목이 메었다.
10년이라도 흐른 것 같던, 오픈한 지 일주일인가 됐던 어느 날, 아래층 살던 친한 언니가 반찬을 좀 만들었다며 잠깐 들르라고 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파김치를 건네던 언니 앞에서 목놓아 울고 말았다. 갑자기 복받침 설움에 엉엉 우는 동생을 꼭 안아주고 등을 토닥여주던 언니는, "아이구... 우리 유정이 힘들었구나... 그래, 그렇게 한바탕 울어~. 애들은 걱정도 하지 마~ 다 잘하더라~"라며 한참을 기다려주었다. 그날을 생각하면 자동으로 눈물이 난다. 무엇이 그렇게 슬펐을까.
나에게 장사란, 일상을 휘젓는 것이었다.
남들 쉴 때 쉬지 못하는 것이었고 아이들과 나누던 일상에 대대적인 칼질을 해야 하는 일이었다. 가족들이 둘러앉은 오붓한 저녁시간은 물 건너간 것이었고 동화책을 읽어주다 함께 잠드는 밤을 포기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잘 지내주었다.
새벽 두 시가 다 되어 집으로 들어서면 두 아이 모두 각자의 침대에서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현관문 앞 바닥에 놓인 종이에는 "엄마, 아빠 힘내세요~"라는 응원의 메시지가 쓰여있었고 식탁 위에는 엄마가 숙제로 내준 문제집이 채점을 기다리며 놓여있었다. 변화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아이들 덕분에 나도 조금씩 적응을 했다.
돌이켜보니 나는 아이들보다 훨씬 나약했다. 어리고 작은 존재였지만, 당시의 나에게 그들은 어른이었고 기댈 언덕이었고 큰 위로였다. 이제라도, 고마움을 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