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꿀 수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by 늘봄유정

시험이 끝났어도 작은 아이의 표정은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시험을 망친 것도 아닙니다. 수학은 평소처럼 만점을 받았고 다른 과목들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큰아이로 인해 '나쁘지 않다'의 기준이 저~~ 아래로 내려가 있던 엄마 아빠였기 때문인지 작은 아이의 성적은 늘 '헉!'하고 놀랄 정도였습니다.


참 아이러니합니다.

큰 아이는 운동장 한가운데에 서서 '기준~~~~'을 외치는 성적이었습니다. 모든 과목이 평균 언저리에 머물며 몸소 중용을 실천하고 있었죠. 하지만 늘 당당했습니다. 공부를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지요. 세상 근심 걱정 없는 아이처럼 해맑고 즐거웠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 만들기에 목숨을 걸었고, 함께 추억을 만들 친구들과의 의리가 끔찍이 중요했던 아이입니다. 졸업 후 자신이 원하는 대학, 학과를 가기 위해 반수를 선택했고 생전 처음 공부라는 걸 하더니 결국 성공했죠.


작은 아이는... 우리 가족이 경험해보지 못한 성적을 받아왔습니다. 엄마 아빠가 자식에게 기대라는 걸 갖게 만들었고 학원에서 장학금을 받는 영광까지 누리게 됐죠. 하지만 방황합니다. 왜 공부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이렇게 공부하는지에 대해 스스로를 납득시키지 못한 까닭입니다.


시험이 끝난 다음날, 아이의 표정이 어두웠습니다.

온라인 수업을 듣느라 힘들었나, 성적이 예상보다 안 나왔나, 무슨 일이 있나 하루 종일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시험이 끝났는데 왜 이리 표정이 어두워?"

"그냥... 힘들어서..."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아들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못했습니다.

저녁 식사 시간. 마주 앉은 아들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우울한 얼굴로 밥그릇만 쳐다보는 아이에게 뭐라도 말을 걸어볼 요량으로 제 머릿속은 시끄러웠습니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도할 무언가를 찾아야 했지요. 마침 낮에 참석했던 유명 교수의 강연회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엄마가 오늘 OOO 교수의 강의를 듣고 왔거든. 차이 나는 클래스라는 프로그램에도 나왔다는데, 이분도 우리가 갖고 있는 고민을 하고 계시더라.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이 얼마나 불행한지, 교육제도에 얼마나 심각한 문제가 있는지 말이야."

"그래서 뭐래? 어떤 해결책을 얘기하는데?"

"답은 하나래. 입시제도를 없애야 한대."

"그게 가능해? 안돼. 우리나라는 입시제도 못 없애."

"그분도 그러시더라. 쉬운 일은 아닐 거라고. 이상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대. 이미 유럽에서는 입시제도가 거의 없대. 고등학교 졸업시험만 있지. 대학은 정말 학문탐구를 원하는 사람만 가는 곳이고 고등학교만 나와도 잘 살 수 있기 때문에 대학에 목숨 걸지 않는데. 게다가 유럽은 몇몇 예외적인 사립대학을 제외하고는 거의 국립대학이래. 그분이 내신 책을 읽어보니까 우리나라에는 사립대학이 비정상적으로 많더라."

"그걸 어떻게 해결할 수 있다는 거야? 그 교수가 혼자서 그렇게 외친다고 이 나라가 바뀌냐고. 어떤 개인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 그 자체가 이상적인 거야."

"그렇지. 개인의 힘으로 어느 날 갑자기 혁명을 일으킬 수는 없지. 그렇다고 모두가 손 놓고 아무 생각 없이 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개인이 사회를 바꿀 수 없는데 그 작은 노력이 무슨 소용이야?"

"그 개개인이 뜻을 모으고 노력하다 보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 아닐까? 입시제도도 그래.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으니 언젠가는 결국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뀌지 않을까?"

"시늉만 내다가 결국 그만두게 될 거야. 너무 엉망이잖아. 바꿀 수 없어."

"그래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하는 건, 너무 허무주의 아닌가? 패배주의인가?"

"정당한 이유가 있어서 아무것도 안 하는 거니까, 그냥 이유 없이 아무것도 안 하는 것과는 분명 다르지. 내겐 정당한 이유가 있어."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하게 되면, 본인의 삶이 너무 남루하게 느껴질 것 같아."

"왜 남루해? 그게 맞잖아. 변화시킬 수 없잖아. 그걸 인정하면 되지."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저항의 목소리를 한껏 내뿜던 아들은, 주말 내 수행평가 준비를 하고 수업 시간 발표 PPT를 만들었습니다.

엄마인 저는, 아들이 마음은 엉망진창이어도 자기 할 일은 알아서 한다며 안심해야 하는 걸까요?

부조리한 현실에 순응해 버렸다며 서글퍼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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