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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May 14. 2021

학교수업의 대리인

디베이트 수업은 6명에서 8명 사이일 때 가장 좋다. 

이야기를 나누기에 지루함이 없고 다양한 생각이 어우러져 다채롭다. 역할을 분담하기에도 적당하고 팀별 협의를 하는데도 무리가 없다. 조금 무리를 하면 12명에서 16명 정도도 괜찮다. 6명에서 8명이 디베이트를 할 동안 나머지 친구들은 심판을 맡으면 된다. 심판을 해보는 경험은 디베이트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어 학생들에게 더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학교 수업도 그렇게 진행된다면 좋으련만 공간의 제약이 늘 뒤따른다. 학교에 봉사 제안서를 보낼 때 분반을 요구하지만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남는 교실이 없단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결국 30명에 이르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디베이트를 가르쳐야 한다. 


첫날은 그래도 괜찮다. ppt를 보여주며 디베이트와 주제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자유롭게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처음 접해보는 분야, 처음 만나는 외부강사에 대한 예의 혹은 낯섬으로 소란스럽지 않다. 오히려 호기심에 가득 찬 60개의 눈동자가 내게 꽂힌다. 

문제는 두 번째 시간이다. 본격적으로 디베이트 실습을 하는 시간. 쉽고 편하게 가자면 제일 똘똘한 정예요원 8명을 선발해 멋진 시연을 보여주고 손뼉 치며 끝내버리면 된다. 하지만 내가 시간을 들여가며 봉사를 다니는 건 소수의 엘리트들 때문이 아니다. 30명의 학생들 중 한 명도 남김없이 실습을 하도록 하는 것이 나의 목표다. 말 잘하는 친구, 똑똑하다고 인정받는 친구들 말고 한 번도 나서서 발표해보지 못했던 친구들도 공적인 말하기를 경험하도록 하는 것. 지적 희열을 느끼도록 하는 것. 심장이 폭발할 것 같지만 한 번 해보고 나니 할만하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 


30명을 네 그룹으로 나누고 한 그룹의 친구들에게 역할을 하나씩 분담한다. 입안자 한 명, 반박자 세명, 요약 한 명, 마지막 초점 한 명, 교차질의 담당자 두 명. 이렇게 분담하면 누구든 친구들 앞에 나와 '토론'이라는 걸 하게 된다. 존댓말을 쓰며 예의 바른 태도로 조목조목 주장을 하는 말하기 말이다. 


강사 입장에서는 정신없는 시간이다. 

자신은 찬성을 하고 싶은데 반대를 맡게 됐다며 입안문을 안 쓰겠다고 버티는 아이.

한 문장 쓸 때마다 확인해달라고 들고 오는 아이.

가위바위보에 져서 입안을 하지 못하게 됐다고 우는 아이. 

앞에 나와서 강사 눈만 꿈뻑꿈뻑 쳐다보는 아이.

깐죽 거리며 수업과 관련 없는 말로 분위기를 흐리는 아이.

교차질의를 하다가 안드로메다로 빠져 엉뚱한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아이.

자신의 순서가 아니라며 옆 뒤 앞 친구들과 장난하는 아이. 

구석에서 우울하고 외롭게 앉아 있는 아이.

이 모든 아이들을 눈에 담고 도와주거나 통솔하는 일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바쁘게 그 시간을 즐긴다. 

맡은 바 역할을 책임감 있게 지켜내고 아무 말 못 하더라도 앞에 나와준다. 

어떤 친구는 완벽하게 토론을 소화해내는가 하면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게 보이는데도 준비한 것을 끝까지 해낸다.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해놓고도 흐뭇해하고 어색하게 내놓는 대답에 만족스러워한다. 


백을 준비해 그중에 열을 주었고 또 그중에 한 개만 아이들이 받았다 하더라도 남는 장사라고 생각해본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괴감이 너무 커지는 게 학교 디베이트 수업이다. 

30명의 아이가 모두 열렬히 토론하고 내 수업에서 영감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을 서서히 내려놓는다. 반만이라도, 아니 3분의 1만이라도... 포기가 아닌 타협이다. 이상적인 목표를 설정해 놓고 스스로를 달달 볶는 나 자신과의 타협. 그게 없으면 교실문을 닫고 나올 때 흐뭇함보다는 허망함이 차오른다.


일회성으로 왔다가는 나도 이런데 학교 선생님들은 얼마나 힘드실까 헤아려본다. 

처음 발령받았을 때 가졌던 야심 찬 포부, 열정, 부단한 시도, 애잔한 마음들을 계속 끌고 가기에는 물리적인 제약들이 너무 많을 테다. 밀려드는 공문과 잡다한 업무, 다양한 아이들을 상대하는데서 오는 피로감, 학교에서 배운 것과 현장에서 경험하는 것의 괴리. 그 가운데서 눈물을 머금고 하나씩 쳐내게 되는, 교사로서의 이상향. 


어쩌면 교육자원봉사는 외부인이 학교 현장의 문제점과 교사들의 현실을 알게 되는 현장체험학습일지 모르겠다. 교육자원봉사자는 학교 교사들이 현장에서 이러저러한 한계로 포기했던 것들을 구현해내는 대리인일 수도 있겠다. 


다시 시작된 봉사와 함께 고민이 깊어진...

나는 교자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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