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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May 19. 2021

내 맘대로 되는 한 가지

아이가 다니는 고등학교의 학부모 밴드에 개인 채팅이 올라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드립니다. 전 2학년 여자아이 엄마입니다. 문의드릴 게 있어서요."

마른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학부모님들이 절 찾는 경우는 거의 대부분, 99.9% 학교에 건의사항이 있을 때였기 때문입니다. 시험기간이 왜 이리 짧냐, 왜 이리 기냐, 다른 학교는 안 그런데 왜 우리 학교만 그러냐, 다른 학교는 이렇게 하는데 우리 학교는 왜 안 하냐, 학교가 춥다, 덥다, 밥이 맛없다, 부족하다, 면학분위기 조성이 안된다, 공부하는 애들만 관리한다 등등... 백인백색의 고민과 질문을 4년 동안 받아온 터였거든요...


전화번호를 알려드리고 전화를 기다렸습니다. 마음의 준비도 해두었죠. 어떤 불평불만도 잘 버무려 학교에 전하겠다는 마음으로요.

"안녕하세요~ 제가 아침부터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연락을 드리네요. 당황하셨죠?"

"아니에요~ 반갑습니다~"

"아.. 어디에 얘기할 데가 없어서 이렇게 회장님께 전화드렸어요."

"네.. 무슨 일이신데요?"

"음.... 저희 아이가 공부를 아주 못하거든요..."

"아... 그건 뭐, 네... "

이 대목에서 살짝 당황스러웠습니다. 아이가 공부 못한다고 해서 엄마가 죄인이 되는 게 아닌데 전화주신 어머님은 어떤 이야기를 꺼내기 전부터 그 얘기를 꺼내셨고 잔뜩 움츠러드셨더라고요.

"그래서 담임 선생님께 상담드리기가 힘들더라고요. 아무래도 공부 잘하는 아이들 위주로 조언을 해주시지 않을까 해서요..."

"모든 선생님이 그러시지는 않겠지만, 선생님이 어떤 걸 중요하게 생각하시냐에 따라 간혹 그런 경우도 있기는 하죠... 어떤 문제가 있으신대요?"

말씀 꺼내기를 주저하시는 어머님을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그게요, 아이가 공부를 너무 못하고 안 해서 걱정이에요. 엄마인 저만 발을 동동거리고 아이는 아무 걱정도 안 하는 것 같아서요. 저... 어떻게 해야 하죠? 대치동에 입시 컨설팅을 가볼까도 고민하다가 일단, 졸업한 자녀도 있고 하셔서 회장님께 연락드렸어요."


순간 멍~해졌습니다. 제가 감히 조언이라뇨...

"아... 그런데 제가 어떤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아이와 관계가 너무 안 좋아졌거든요. 아침마다 싸워요. 저는 이렇게 마음이 급하고 속이 타는데 아이는 아침마다 한 시간씩 화장을 하고 도대체 생각이 있는지 어떤 건지..."

"아마 아이가 가장 많은 고민을 하고 있을 거예요~ 친구들끼리도 입시나 진로 얘기를 많이 나눌테구요. 생각이 없는 아이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럴까요? 보기엔 전혀 아닌데."

"그럼요. 우리는 다 지나온 길이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만 아이들은 처음 겪는 일이니 잘 모를 수밖에요. 그렇다고 엄마 아빠가 해주는 말들이 귀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구요."

"맞아요... 그래도 2학년 때 성적이 제일 중요한데, 첫 시험도 망치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너무 고민이더라구요."

"그렇죠... 코로나 때문에 결국은 성적이 제일 중요한데, 아이들은 아직 자기 성적으로 어디를 지원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감이 없어서 그런지 심각하게 느끼지 못하더라구요. 저희 큰아이도 5등급이었는데 2학년 때까지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더라구요."

"그쵸그쵸... 정말 답답해요..."

"그런데요, 아무리 옆에서 얘기해도 공부는 결국 자신이 절박해야 하고 스스로 동기부여가 돼야 하더라구요. 자꾸 얘기해봐야 관계만 안 좋아져서 나중에는 성적도 안 남고 부모 자식 관계도 안 남는 것 같아요..."

"저도 그게 걱정이에요... 회장님은 어떻게 하셨어요?"

"저... 큰아이 고등학생 때 맘고생 많이 했어요... 공부만 안 하는 게 아니라 놀기도 엄청 놀았어요. 술, 담배도 몰래 했고요. 그런데 엄마 잔소리는 듣기 싫어하잖아요. 그래서 전, 집에서 바쁜 척했어요. ㅎㅎ 직장도 없어서 어디 나갈 데도 없고 집에만 있는데 할 일은 없고... 그래서 김치, 장아찌 이런 거 담그면서 애한테 신경 안 쓰려고 했네요... 고기 궈서 밥만 줬구요."

"아... 그렇군요... 결국, 지금 아이한테 제가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없겠네요...?"

"네... 밥해주는 것밖에 없는 것 같아요. 저... 근데 제가 지금 어딜 좀 가는 길인데, 거의 도착을 해서요... 필요하시면 학교 진로부장 선생님 전화번호를 좀 남겨드릴까요?"

"아! 네~ 바쁘신데 죄송해요~ 어디 다니시나 봐요?"

"둘째한테 신경 좀 덜 쓰려고, 이제는 봉사를 다닙니다. 하하하. 같이 해보실래요? 하하하하."


도움이 되는 조언은 아니었지만 초면인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대화 말미에는 점심 약속을 하기도 했지요.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게는 많은 고민거리와 이야깃거리를 안겨준 큰 아들이 있거든요. 공부를 안 하고 못하는 아이의 전형과도 같은 아이였습니다. 꿈은 높은데 노력은 안 하는 아이. 고민은 하는데 입으로만 하는 것 같고 의지는 없는 아이. 엄마 속이 썩어가는 것은 모르고 얄미우리만치 당당했던 아이...

엉망인 성적표를 받아와서도 당당하게 고기를 요구하는 아이에게 밤 12시든 1시든 고기를 구워줬습니다.

속으로는 씨불씨불거렸지만 꾹 참았죠. 제 잔소리에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리면 영영 제 앞에 앉아주지 않을 것이 두려웠던 까닭입니다. 제가 차려준 밥상에 앉았을 때 비로소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었으니 그 순간만은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원치 않는 대학, 원치 않는 학과를 가고 나서야 변했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을 하고 고민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의지를 다지더군요. 조금만 더 일찍 정신 차렸다면 시간과 비용을 아낄 수 있었겠지만,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는 말로 덮어두었습니다.



아이와 관련된 일은 그 어느 것도 제 맘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딱 하나. 밥상에 앉히는 것만 제 맘대로 됐습니다.

지들도 밥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고기 굽는 냄새 앞에서는 무장해제되니까요.

그래서 좋아하는 김치를 만들고, 고기와 함께 먹을 장아찌를 담갔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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