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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Jun 03. 2021

25년 후

"쌤~ 기뻐해 주세요~ 저 3등급 받았어요~"

"뭐? 어떤 과목이? 아니지? 너 이제 고1 중간고사 봤는데 무슨 등급이 벌써 나와?"

"아... 성적 아니구요... 그리고 성적 얘기는 하지 말아 주세요 쌤..."

"그럼 뭐가 3등급이라는 거야?"

"저희 반 여자애들이 남자애들 등급을 매겨줬거든요. 근데 다행히 전 3등급이에요."

"헐... 남자애들에게 등급을 매겼다고? 몇 등급까지 있는데?"

"1등급부터 9등급이요."

"지금, 거기서 3등급 됐다고 다행이라고 한 거야? 좋아서?"

"그럼요~ 이왕이면 좋은 점수받는 게 좋죠~"

"그걸 들은 남자애들 반응은? 가만히 있어?"
"그냥 다 웃고 떠들고 끝인데요?"

"문제 제기하는 아이도 없고?"

"웃자고 하는 거에 정색하는 게 더 이상하죠."

"아... 정말 세상이 완전 반대가 됐다. 남자애들이 여자애들 등급 매겼다고 생각해봐. 크게 문제 될 거 아니야? 그런데 여학생들이 남학생들 등급을 매긴 거에 아무 문제의식이 없다고?"

"속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아무도 뭐라고 하는 애 없던데요?"


디베이트를 배우는 고1 남학생이 전해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처음엔 여학생들이 남학생들을 9등급으로 나누어 점수를 매긴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세상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었죠.


25년 전, 제가 대학생이던 시절 같은과 남자 선배들이 학교 정문 근처에 있는 단과대학 계단에 앉아서 하던 놀이가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여학생들에게 점수를 매기는 것이었습니다. 10점 만점에 몇 점인지, 이유는 무엇인지를 나열하는 그 놀이를 옆에서 지켜보며 같이 웃고 떠들던 제가 생각났습니다. 문제제기를 했다거나 정색을 하며 질타했던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과거 있는 여자는 용서해도 가슴 작은 여자는 용서 못한다."던 한 선배의 말에만 "너무한다!"라는 정도의 소극적인 대응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변명을 하자면, 저뿐 아니라 어떤 여학우도 그런 상황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몰라서 못했던 것인지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런데 25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반대가 돼 있네요. 

그것을 여성의 권익이 신장됐다는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 바뀌었다며 좋아할 수는 더더욱 없고요.

세상이 바뀌지 않았다는 방증도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이 더 나빠졌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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