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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Oct 21. 2019

D-100 프로젝트
< D-69 >

사람은 '언젠가' 죽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죽을 수 있다.( 키키 키린 )               

100일 후에 죽는다고 생각하고 살면 하루가, 세상이 달라 보일 것이다.


살다 보면 누구나 그런 날이 있다.

몸도 마음도 지쳐,  그냥 '다 내려놓고 싶은 날'. 오늘이 그날인 것 같다.


#1. 

디베이트 마을교사 양성과정 시작 5분 전, 한 선생님께서 조심스레 다가오셨다.

"저, 선생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네~ 말씀하셔요~" 해맑게 답했다.

"제가, 지난주에 디베이트 실습 후에 아이들이 하는 디베이트 동영상을 많이 봤거든요... 그런데, 보면 볼수록 디베이트가 너무 자기 팀이 잘났다고만 주장하는 것 같고, 디베이트를 해보면 끝에 가서는 상대팀의 의견에 동의할 수도 있는 건데 마지막까지 너무 우기기만 하는 것 같아요. 이런 교육방식이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양측의 의견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된다는 생각이 들지가 않아요. 다른 좋은 방법도 많을 텐데 왜 꼭 이 디베이트라는 걸 학교에 가서 가르쳐야 하는지 이해가 안돼서요. 마을교사로 학교에 가서 잠깐 가르치는 것으로 아이들의 논리력이 신장될 거라는 기대도 안 들고요."

또 이 질문이었다. 작년부터 이곳저곳에서 듣고 많이 고민했던 부분. 이 양성과정의 첫 시간에도 디베이트가 가진 훌륭한 가치를 알아주십사 말씀드렸던 그 부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납득이 안되신다는...

영화 '제5원소'에서 여주인공 '리루'는 수천 년간 잠들어 있었기에 그간의 역사를 몰랐다. 따라서 한꺼번에 역사를 공부해야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인간들의 전쟁, 폭력, 범죄 등 어두운 역사를 알게 되고 왜 지구를 구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울먹였다. 

내게 질문을 하신 선생님의 표정이 딱 '리루'같았다. 디베이트라는 프로그램에 잔뜩 겁먹은 표정...


수업 시작과 동시에 다른 선생님들과도 함께 고민을 나누며 자유토론을 했다. 디베이트가 가진 형식이 어떤 목적을 갖고 어떤 효과를 갖고 있는지를 이해한다는 분도 계셨지만, 찬반으로 나누는 것 자체에 대한 반감부터 끝까지 우리 편의 논리가 더 맞다고 우기는 것이 억지스럽다는 의견들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 과정을 담당한 교육지원청 관계자 분도 국장님에게 한소리 들으셨단다. 하고많은 프로그램 중에 왜 경쟁교육을 부추긴다는 디베이트냐고... 자체 회의를 거친 결정이냐고... 중간에서 설명하느라 애먹으신듯 했다.


찬반으로 나뉘는 주제를 갖고 토론했을 때 양 팀의 기량을 제대로 볼 수 있고 논점이 확실해진다는 것.

순서와 형식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공정성의 가치를 실현시켜주고 양 팀의 논리를 비교할 수 있는 장치라는 것.

서로의 의견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인정할 부분에 대해서는 일부 인정, 동의하면서 합리적 대안을 제시하며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것.

자신의 소신과는 다른 입장을 변호하면서 사고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

학생들 개개인을 모두 만족시키고 모든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완벽한 교수법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으니, 디베이트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구현할 수 있는 부분들에 집중하자는 것.


매번 이것을 말로 설명해야 한다면, 이건 '디베이트'가 가진 극복할 수 없는 큰 문제점이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걸 풀어내는 내 능력의 부족인가? 내가 보지 못하고 놓치는 치명적인 무언가가 있는 걸까? 내가 수업에서 보고 느꼈던 것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느끼고 싶은 것만 느꼈던 나의 아집이었을까?

답도 못 구하고 맥이 빠졌다.


#2.

작은아이가 지원한 고등학교의 면접일이었다. 몇 주 동안 자소서와 생기부를 반복해서 읽고 예상 질문을 만들어 보고 답변을 준비했다. 읽었던 책들을 정리하면서 내용을 다시 확인하고 진학 후 진로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했다. 3주째 진행되고 있는 면접 때문에 면접관들이 지쳤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월요일이고 두 번째 순서이니 주말 동안 재충전하고 오신 면접관들께서 잘 봐주시지 않을까 기대했다. 

수업이 있는 나 대신 아이를 데리고 다녀온 남편이 전해준, 면접을 마치고 나온 아들의 첫마디는 "망했어!" 였단다. 압박면접이었다거나 질문이 너무 어려워서 당황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되려, 면접관분들이 너무 의욕 없이 '에고, 또 왔구나...'같은 느낌이 들게 의무적으로 질문을 하는 모습에 당황했다고 했다. 자소서와 생기부 구석구석에서 다양한 질문을 받았지만 만족스럽게 답하지 못했다고 했다. 

만족스러운 면접을 봤다는 이가 있겠는가... 늘 아쉬운 법이겠지... 

다만,  홀로 무수히 쏟아지는 질문들을 온몸으로 막아냈을 아이에 대한 안쓰러움과 더 많이 도와주지 못한 미안함, 물질적으로든 심적으로든 더 뒷바라지해줬다면 달라졌을까 싶은 아쉬움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1-1

오후에 수업하러 간 중학교의 학생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재잘거렸다.

"쌤~ 디베이트를 하고 나니 학교 토론 수업이 쉬워졌어요~" 

"뭔가 상대방의 말을 잘 듣게 되고 반박도 잘하게 된 것 같아 신기해요~"


"얘들아~ 너희들은 디베이트 하면서 너희들이 더 폐쇄적이 되고 소통하기 힘든 사람이 됐다고 생각되지는 않니?"

"아뇨~? 오히려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던대요?"


주제가 어려워서 오늘은 디베이트를 못하겠다고 하더니 막상 실습이 시작되니 어느 때보다 열심히 토론을 했다. '내 얼굴에 내 고민이 잔뜩 드러났나? 이 착한 아이들이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이리도 애쓰는가?'라고 의심될 정도로...


겁에 질린 '리루'에게 주인공 '코벤'은 인간들이 가진 아름답고 긍정적인 가치들, 특히 사랑을 알려준다. 결국 사랑의 힘으로 지구를 구하게 된다는 결말.

디베이트도 그렇다고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자연스럽게 파생되는 부작용들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외에 더 크고 의미 있는 가치들이 있다고... 또한 코치의 세심한 수업 운영으로 더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다고...


#2-2

저녁나절이 되어서야 상봉한 작은 아들을 안아주며 "수고했어~"라고 토닥여줬다.

"많이 아쉽지?"라고 물으니 딱 한마디 한다.

"후회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야..."

짜식... 아쉬우면 아쉽다고 하지... 어디서 멋있는 멘트는 알아가지고... ㅎㅎ


빅터 프랭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서 내게 울림을 준 구절.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YES!"

그저 다 내려놓고 싶은 날이었지만 그 모든 일에도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 의미들이 날 성장시킬 것이다. 

그전에 일단... 다 내려놓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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