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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Aug 05. 2021

에너지 전환 갈비탕

"썩을 놈의 병원!"

더 심한 욕을 써본 적이 없어 그 정도로 끝내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내가 아니라 그 병원이 말이다.

분노는 원망으로 원망은 저주로 이어졌다.

"진짜 나쁜 병원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분명히 이마도 보여주고 충혈된 눈도 보여줬잖아. 혹시 대상포진이 아닐지 물어보기까지 했잖아. 그게 의사야? 그게 병원이야? 비타민 수액이나 맞고 갔으면 좋겠다고? 돈독만 올라가지고는... 어떻게 복수하지? 확 망해버려라."


하루 전.

왼쪽 머리와 왼쪽 귀 뒤, 왼쪽 목의 통증, 왼쪽 눈 충혈, 왼쪽 이마의 수포.

의사에게 전하고 보여준 아이의 증상이었다. 심드렁하게 입을 벌려 목 안을 들여다본 의사는 피곤해서, 면역력이 약해서라고 했다. 뭐 요즘 힘든 일 있냐는 위로 섞인 멘트를 날리기도 했다. 석연치 않았던 나는 의사를 잡고 늘어졌다.

"대상포진은 아닐까요? 여드름 잘 나는 애가 아닌데 이마에 뭐가 잔뜩 났는데..."

그저 잘 먹고 잘 쉬라는 말 외에 별말이 없었다.


'아닌가 보구나. 다행이네. 그래, 고등학생이 무슨 대상포진이야...'

푹 쉬어야 할 방학을 학기 중보다 더 힘들게 보낸 아들이 딱해서 새벽 배송으로 갈비와 전복을 주문했다. 어미가 해줄 수 있는 건 보양식뿐이니까.


다음날 새벽, 현관 앞에 있는 보냉백을 들여와 찬물에 갈비를 담갔다. 저녁에 먹이려면 적어도 반나절은 핏물을 빼놓아야 한다. 전복은 일단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먹기 전 갈비탕과 같이 끓여내면 되니 그때까지 냉장고에서 대기.


방에서 자고 있는 아이는 일부러 깨우지 않았다. 아침이면 벌떡 벌떡 일어나는 녀석이 12시가 다 되어서야 눈을 떴다. 그런데 이게 웬일....

드문 드문 있던 수포는 왼쪽 이마를 잔뜩 덮었고 왼쪽 눈은 퉁퉁 부어있었다. 피곤하고 면역력이 약해졌다는 진단만 믿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서둘러 점심을 먹이고 동네에 유명한 피부과를 찾았다. 언제 가도 대기시간이 두 시간이라는 곳이었지만 차분히 기다렸다.


아이의 얼굴을 본 의사 선생님은 바로 내 얼굴을 쳐다보셨다.

"그거예요."

"네?"

"어머니가 생각하시는 그거 맞아요."

이건 뭐, 무릎이 닿기도 전에 고민을 알아맞힌다는 무릎팍 도사도 아니고 환부만 보고도 단번에 알아맞히는 명의가 아닌가...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당황한 선생님은 담담히 말씀을 이어나갔다.

"일단 통증이 심한 건 아니니 먹는 항바이러스제와 바르는 약을 처방해드릴게요. 지켜보시다가 통증이 심해진다 싶으시면 언제든 오세요. 의뢰서 써드릴 테니 대학병원에 입원하시는 방법도 염두에 두세요. 요즘은 학생들도 많이 걸려요. 전 두 살짜리 아이가 걸린 것도 봤는걸요. 잘 먹고 잘 쉬면 금방 나아요. 걱정 마시고 먹는 거 잘 챙겨주셔요. 그리고 안과도 꼭 가보시고요. 눈이 많이 충혈되어 있어서 진료받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다음으로 찾아간 안과에서 간호사들은 딱한 눈으로 아이를 쳐다봤다. 슬쩍 보기만 했어도 아이가 대상포진인 것을 알아본 것이다. 그러니 전날 들렀던 내과 의사를 향한 나의 분노는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수포를 봤으나 대상포진을 생각하지 못했다면 그건 자격 미달 의사 아닌가. 의사가 아닌 나도 의심했는데 말이다.

대상포진은 수포가 생긴 후 72시간 내에 항바이러스제를 먹어야 신경 손상을 최소화할 수 있다. 그 의사 때문에 24시간을 날려버린 것이다.


약국에서 약을 받아 들고 나오며 분노가 극에 달했다.

"어떻게 하지? 당장 찾아갈까? 전화를 해야 하나? 어떻게 복수를 하지?"

자가발전 중인 엄마 옆에 가만히 서있는 아이를 보니 또 눈물이 났다.

"얼마나 혼자 맘고생이 심하고 피곤했으면 이렇게 몸으로 드러나니 그래... 너무 딱하고 미안하다."

아이와 집에 오는 동안 전날 갔던 병원을 향해 할 수 있는 온갖 악담을 퍼부었다. 집에 와서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전화를 걸어 따질까, 어디 신고할 데는 없나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가 싱크대 위 스텐 양푼 안, 시뻘건 물속에서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갈비가 눈에 들어왔다.


벌써 저녁 5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저녁에 당장 갈비탕을 먹이려면 서둘러야 했다.

핏물을 버리고 끓는 물에 한번 튀긴 갈비를 찬물과 함께 압력솥에 넣었다. 지인이 알려준 '갈비탕 빨리 맛있게 끓이는 법'을 상기해 그대로 따라 했다.

압력솥 추가 모두 내려간 갈비 국물에 파, 통마늘, 인삼, 황기, 대추, 무를 넣고 한 시간 더 끓였다. 고기가 부드럽게 익었음을 확인하고는 뚝배기에 1인분만큼 덜어냈다. 그득 담았다. 2인분 같은 1인분.

갈비와 인삼, 대추, 무를 넣은 뚝배기에 손질한 전복 두 마리를 함께 넣고 10여분을 더 끓였다.

파, 소금, 후추, 겨자장을 곁들여 아이의 저녁상을 차렸다.

오른쪽 눈만 겨우 뜬 아이는 뜨끈한 국물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하마터면 분노로 소비될 뻔했던 에너지를 갈비탕을 끓이는 데에 쏟아부었다.

전화를 하면 뭐할 것이며 찾아가면 뭐할 거냐. 환불은 고사하고 죄송하다며 사과를 할리는 더더욱 없을 테다.

지역 맘 카페에 저격 글을 올려볼까도 생각했지만 마음을 고쳐먹었다. 의사의 무능을 만천하게 고한들, 병원의 탐욕을 알린다 한들, 아이의 수포와 통증이 가라앉을 것도 아니다.

그렇게 나의 분노를 잠재우느라 갈비탕을 끓일 골든 타임을 놓친다면, 아이의 증상을 제대로 알아내지 못해 치료의 골든타임을 늦춰버린 그 의사와 다를게 무엇이겠는가.


악용, 오용될 뻔했던 나의 에너지는 고스란히 갈비탕으로 녹아들었다. 시간 맞춰 약을 먹이고 바르며 아이의 변화를 신속하게 알아내고 대응하기 위한 에너지로 전환시켰다.

어쩌면, 그 의사 덕분에 하루빨리 진한 갈비탕 국물을 먹일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분노를 용서로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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